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 년 전, 우리의 불순종과 교만, 탐욕과 시기질투 등을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다. 십자가와 구원에 대해 깊이 되새겨 볼 만한 고난주간, ‘십자가’와 ‘구원’을 주제로 최근 나온 도서들을 살펴본다.

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
마크 베이커·조엘 그린 | 죠이선교회 | 340쪽 | 16,000원

모든 교회 지붕마다, 많은 크리스천 여성들의 목걸이마다 걸려 있는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2천년 전 예루살렘에 달려 돌아가신 ‘형틀’이다. 기독교는 왜 예수님을 죽게 만든 ‘고문 도구’를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는가. 그 십자가가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피면서, ‘십자가=속죄’라는 등식 때문에 가려진, 신약 성경 속 십자가의 다양한 관점들을 불러낸다. 이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자칫 잊고 지나갈 수 있는, 로마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자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던 십자가의 풍성한 의미들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의 죽으심의 중요성’은 사실상 ‘속죄의 의의’, 곧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교리다. 더욱이 신약 성경과 신학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 공동체 안팎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쉽게 설명하는 다양한 은유를 많이 찾을 수 있는데도, 지난 200년 동안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명제는 점차 ‘형벌 대속(penal substitution)’이나 ‘형벌 보상(penal satisfaction)’이라는 교리의 형태로 나타났다.”

저자들은 기독교 운동 초기의 수십 년 동안은 십자가의 의미보다, “나무에 달린 자는 여호와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는 율법이 알려주듯 그 ‘치욕’에도 방점이 찍혀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의 처형이라는 ‘그림’은 한 가지 색으로 채색될 수 없었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었으나, 오늘날 그 다양한 해석들은 빛을 잃었고 신학은 메마른 토양처럼 변해 십자가에 대한 한두 가지 명제만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

이는 특히 서구 기독교에서 ‘신약 성경의 유산’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형벌 대속론’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형벌 보상론’이 유행하는 까닭은, 해석과 역사 신학보다는 개인주의와 기계주의를 강조하는 서구의 문화적 이야기와 관련이 깊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만 봐도,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구원의 효력에 대해 그 시대 생활환경에서 빌려 온 다섯 가지 은유, 곧 법정(칭의의 예), 상업(속량·변상의 예), 인간관계(화해의 예), 예배(제사의 예), 전쟁(악을 이긴 승리의 예) 등에 빗대어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초기의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깊이 고민해야 할 수수께끼이자 탐구해야 할 역설이었고, 성찰해야 할 물음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쓴 4복음서에는 깊이 숙고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개인의 고통이나 사회의 비극을 신앙의 치욕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실패로 생각하여 그분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 많다”며 “십자가를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두는 사람들조차 십자가가 현대 제자들에게 주는 의의에서 치욕을 빼 버림으로써 그렇게 한다”고 지적한다.

▲신약 성경의 선교사와 신학자들은 속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을 찾지 않았고, 자유롭게 속죄의 의의를 성찰했으며, 십자가의 말씀을 특정 상황에 맞게 전하며 다양한 청중에게 도전했다. 아울러 교회사에 나타난 속죄의 이미지들은 흔히 특정 상황에 맞게 십자가의 의의를 전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십자가에 관한 한 대세라 할 수 있는 ‘속죄론’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라, 속죄론으로만 십자가의 의미를 제한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형벌 대속론’도 신약 성경의 예처럼 개인주의와 기계주의라는 중세 이후 서구 문화 생활환경에서 유력하고 잘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설명이었으나, 다른 문화나 사회 환경에선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특히 일본 선교사의 예를 통해 서구에서 잘 다루지 않는 ‘치욕’이라는 면에 주목한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는 속죄 신학을 오해하거나, 성경의 메시지와 무관한 속죄 개념을 갖고 있다. 마치 무신론자들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진노하는 신’이나 ‘원한을 품은 재판관’ 쯤으로 여기면서, 성자의 죽음으로 그 진노를 풀지 못하면 그 화가 자녀인 우리에게 쏟아질 것이라 오해한다. 한편으로는 점점 속죄 신학을 현실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는 갈수록 기독교인들의 윤리적 삶의 문제가 심각해지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저자들은 “우리가 성경에 충실하려면 오늘날 다양한 세계에 효과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옛 은유와 새 은유를 끊임없이 찾아야 하고, 신약 성경 저자들의 길을 따르려면 친숙한 은유를 찾아서 쓰되 우리 상황에 너무 익숙한 은유는 버려야 한다”며 “그들이 추구했고 우리가 추구하는 은유는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 사회 제도에 영향을 주는 것이어야 하고, 옛 이론이나 그 이론에 담긴 진실을 버리지 않은 채 예언자와 사도들 뿐 아니라 모든 시대 교회들의 안내와 대화를 통해 건설적인 연구로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책은 마태와 누가, 요한과 바울, 베드로 등 신약 성경 저자들이 바라본 십자가를 비롯해 초대교회 이레니우스 및 니사의 그레고리의 ‘승리자 그리스도’, 중세교회 안셀무스의 ‘보상설’과 아벨라르의 ‘도덕 감화설’, 종교개혁 이후 19세기 찰스 하지부터 케빈 밴후저의 포스트모던 시대까지의 ‘형벌 대속론’ 등을 평가한다. 이어 최근 ‘형벌 대속론’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들을 소개한 후, ‘오늘날 교회의 정체성과 선교를 위한 속죄론’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이 갖는 구원 의의에 대한 논의가 확장됐기를 바란다. 선교하는 교회가 성장하고 활동하는 데 모든 크기와 형태, 모든 필요와 상황에 맞는 유일한 속죄론은 없다. 결국 전 세계 수많은 곳에서 예수의 제자 공동체들이 신학자와 전달자로서 기능을 선보이고,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의 죽음의 신비를 새롭고 충실한 이미지들로 전하려고 고민하는 곳에서, 이 책의 다음 장은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