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제가 사도로서 얼마나 가난하게 살 았는지,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여러분들은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긍휼을 말하는 것이 풍요롭기 때문에, 많은 재물을 소유했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진 자가 많은 긍휼을 베풀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부자들은 많은 재물이 있으므로 더 많은 기부와 자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완전한 착각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돈에 관한 어떤 이해도 없습니다. 세상은 오직 돈에 관한 이해만 있기 때문에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닫으십시오!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그분의 나라에서는 재정적 곤경이 없는 만큼, 돈에 관한 어떤 이해도 없습니다. 그분의 나라에서는 돈의 활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만큼 돈에 관한 어떤 이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돈이 최고이지요! 아마도 하나님의 전능과 가장 닮은 것이 있다면 돈일 겁니다. 돈은 알라딘 램프와 같죠. 돈은 소원을 빌면 주인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줍니다. 그러나 누가 누구의 주인인지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주인이고 돈은 종이었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사람은 돈의 종이 되고 돈은 사람의 주인이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은 돈을 보호하고 지키다 생을 마감하는 겁니다. 당신은 구두쇠를 보고 이를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돈은 쓰레기에 가깝습니다.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많은 사람들은 영원이 환상이고 돈이 실제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영원과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돈은 환상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십시오!

좋습니다. 제가 사도의 권위로 당신께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봤던 것들이 다 저 나라에서도 있기를 간절히 소원해 보십시오. 나무들과 꽃들과 별들이 그분의 나라에도 있습니까?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와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그분의 나라에도 있습니까? 그러나 당신의 눈에 그분의 나라에 돈이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분의 나라에 돈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분의 나라는 인간적으로 말해 궁핍의 땅입니다! 가장 가난한 나라이지요. 여러분들이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가난한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러나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돈을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이 거짓인 것처럼, 영원을 믿는 자들에게는 돈이 거짓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볼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돈만큼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반면 하늘의 긍휼만큼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긍휼이 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돈! 돈! 돈! 세상은 돈이 전부입니다. 제가 하늘에서 보니 대부분 돈 신을 섬기고 있군요.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말입니다.

옛날에 저 유구르타 왕이 로마 황제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판매 중인 도시가 있다. 구매자를 기다릴 뿐이다."

아,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낙심하여 자신의 모든 실존을 거부하는 시험에 빠집니까? 그는 말합니다. "여기에 판매 중인 세계가 있다. 구매자를 기다릴 뿐이다."

혹시 악마가 이미 이 세계를 구매한 것은 아닌지요? 당신은 악마에게 당신의 세계를 팔아버린 자는 아닙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토록 긍휼보다 돈에 더 관심이 많은 겁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무엇이 인생의 진지함입니까? 당신은 돈이 없기 때문에,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이 진지해졌습니다. 그동안 즐겁게 살았지요. 그런데 지금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슬프고 인생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러나 진지함이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정말로 진지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각이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현존할 때, 진지해집니다.

그러나 돈은 세상의 신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돈과 관련된 모든 것, 돈에 참여하는 모든 것이 진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고상하고, 순박하고, 지혜로운 소크라테스를 보십시오. 그는 이방인일지라도 자신의 가르침에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돈을 받음으로써 복음을 훼손하고 사도로서 섬김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말씀의 선포를 조작하기보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기를 더욱 좋아했습니다.

세상은 이런 일에 대하여 어떻게 판단합니까? 세상이 저 고상하고 순박한 사람과 거룩한 사도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어리석게 묻지 맙시다. 세상은 기계적으로 그들을 찬양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그러나 이 두 사람이 행했던 대로 오늘 이 순간에 행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시대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그들은 이것은 괴팍한 행동, 엉뚱한 과장으로 판단할 겁니다. 그들은 그런 사람은 "진지함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겁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버는 것이 진지함입니다. 사람을 팔지라도 많은 돈을 버는 것, 이것이 진지함입니다. 경멸적인 중상모략으로 많은 돈을 버는 것, 이것이 진지함입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므로, 어떤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지함입니다. 돈, 돈, 이것이 진지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양육받은 방식입니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돈에 관한 사악한 예배로 길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돈 없는 긍휼이라? 돈 없는 긍휼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긍휼임에도, 세상은 이런 긍휼을 가진 자를 미쳤다고 말할 겁니다. 일종의 광기, 일종의 착각으로 간주할 겁니다. 어떤 이방인의 황제는 돈 냄새를 맡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돈 냄새를 맡으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돈 냄새가 역겹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겨운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언제나 더 강렬한 향기를 가져옵니다.

긍휼을 가져오라, 긍휼을 가져오라, 긍휼을 가져오라! 그리고 그때 돈을 가져올 수 있지요. 그러나 긍휼 없는 돈은 아주 구린내가 납니다. 보십시오! 거지도 이 황제처럼 역겨운 냄새를 말할 수 있습니다. 황제와 자본가만큼이나 이 거지의 말도 치명적이군요. 긍휼은 강한 향기입니다.

기도가 입술의 제물이요,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면, 긍휼은 실제로 마음의 제물이요, 성서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코에 달콤한 향기입니다(엡 5:2). 오, 당신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돈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조차 없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