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질주 8
▲<분노의 질주 8>에 등장하는 레이싱 장면들은 모두 생과 사의 경계를 오가는 데서 오는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분노의 질주(The Fast and the Furious)' 시리즈는 자동차에 결부된 일탈의 본능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죽음 충동(death-drive, Todestrieb)을 '제대로' 자극하는 영화다. 여타의 액션 영화들이 총기, 폭탄, 전투기술 등을 통해 죽음의 위기를 시각화하는 반면,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고 영위하는 '운전'과 '속도'를 내세워 죽음의 근접성을 절감하게 하기 때문이다.

<분노와 질주 8>의 실감나는 속도감 및 긴장감이 선사하는 죽음 충동은 일탈 욕망의 대리만족과는 차별되는 방식으로 관객의 마음 속에 해방감을 선사한다.

◈속도와 죽음: "어느 날 속도가 나를 죽인다면(If one day the speed kills me)..."

<분노의 질주 8>의 흥행성적은 현재까지 제작된 시리즈 작품들 중 두 번째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리즈 최고 흥행성적은 2015년 개봉한 전작 <분노의 질주 7>이 기록했다. 사실 서사 자체는 <분노의 질주 8>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달리고 부수고, 그래서 결국 악역을 물리치고, 그 이상은 없다. 액션의 화려함도 금번 개봉한 제8편이 더 화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감상평과 평점은 제7편에 보다 후하게 돌아간다. 여기에는 제7편 촬영기간 중 자선행사에 참여하러 가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배우 폴 워커(Paul Walker, 1973-2013)에 대한 애도와 동정이 관여되어 있다.

2013년 11월 30일, <분노의 질주 7>의 촬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폴 워커는 자신이 소유한 슈퍼카 포르쉐 카레라 GT를 타고 필리핀 태풍피해 이재민을 돕기 위한 자선행사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운전석에는 워커의 친구 로저 로다스(Roger Rodas)가 타고 있었다. 로다스는 유명 투자은행 메릴린치(Merrill Lynch)의 자산관리사로, 폴 워커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열성적인 레이싱 매니아로 같은 레이싱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사고는 과속 때문에 발생했다. 제한속도 약 70km 구간에서 시속 150km로 운행하다 차량이 가로수에 충돌했다. 충돌 후 화재가 발생해 두 사람은 시신조차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경찰과 소방수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원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시신이 훼손된 상태였다고 보고됐다. 이후 <분노의 질주 7>은 시나리오를 대폭 각색해 폴 워커의 등장 비중을 줄였고, 체형과 인상이 비슷한 그의 두 동생이 대역을 맡아 연기한 뒤 CG 처리해서 촬영을 완성하였다.

분노의 질주 8
▲폴 워커 사고차량. 발견 당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파손된 상태였다.
자동차 액션 영화 주인공이 럭셔리 스포츠카 사고로 사망하자 즉시 전설이 되었고, 영화는 이런 애도 분위기에 편승해 시리즈 최고 흥행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스트리트 레이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집안 내력도 그를 전설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폴 워커의 조부는 모터스포츠 레이서였으며 부친도 스트리트 레이서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진다. 폴 워커 본인도 평소 레이싱을 즐기며, 영화배우로 성공한 후로는 초고가 고성능 스포츠카를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레이싱에 살고 레이싱에 죽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폴 워커는 고속 스트리트 레이싱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폴 워커가 자신의 SNS에 남긴 말이다. "어느 날 속도가 나를 죽인다면 울지 말라. 나는 웃고 있었을 테니까(If one day the speed kills me, don't cry because I was smilling)." 그리고 그는 자신이 예언처럼 남긴 말 그대로 사라져 갔다.

도대체 속도가 무엇이길래,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중독시킨 것일까? 속도는 죽음을 맛보게 한다. 운전자가 제어할 수 없는 속도는 곧 죽음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운전자를 전율하게 만든다. 속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죽음에 가깝게 다가간다. 폴 워커를 중독시킨 이 절박한 감정은 <분노의 질주> 전 시리즈의 중심적 흥행요소이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자동차 자체의 화려함이 아닌, 속도에 열광케 하는 영화다. 유사한 자동차 액션 영화로 유명한 것이 니콜라스 케이지(Nicolas Cage),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 주연의 <식스티 세컨즈(Sixty Seconds, 2000)>인데, 이 작품은 속도감 자체보다 주인공들이 훔치는 차종의 화려함에 빠져들게 만드는 영화다. 반면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차종의 화려함보다 속도 그 자체가 주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분노의 질주 8
▲<분노의 질주 1> 영화 포스터. 속도감 구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법 스트리트 레이서들은 법규를 어기고, 속도를 위반하고, 위험한 레이싱 기술을 선보임으로써 자신의 가치와 인기를 높인다. 그러나 이런 외적 보상 외에도 위험한 초고속 질주 자체가 선사하는 만족감과 해방감이 따로 존재한다. 운전자 자신을 죽음에 가깝게 견인해 가는 행위는 그의 내면을 지배하는 죽음충동을 자극하여 초월에 맞닿은 자기 자신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죽음 충동: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 실은 어느 한 순간도 달성된 적 없는 것들에 불과하다면..." (Sigmund Freud)

죽음 충동은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에 의해 정립된 개념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높은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였으나, 과학적인 학문으로서의 가치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일관된 원리를 명확하게 담아내지 못하는 임상사례들 외에는 정신분석학의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인 무의식(unconscious)은 사실상 증명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문화철학 분야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나름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과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프로이트 사상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가운데, 그가 제시한 죽음충동에 대해 보다 현대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특히 지젝은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이어받는 가운데 기독교적 개념을 차용해,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는 죽음충동을 규명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관심을 유도하는 대목이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하나의 신비로 규정한다. 사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죽음충동이란 개념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1920년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이 새로운 개념을 발표하였다.

이전까지 프로이트는 사람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생존 본능에 직결되는 성충동(libido)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거듭되는 임상 속에서 그는 성충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특이한 강박적 증세들을 발견하고 이를 죽음과 연관지어 해명한다.

분노의 질주 8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의 노년기 모습. 죽음 충동에 대한 연구는 학문적으로 원숙해진 노년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갈망하는 시대적 요청이 반영돼 있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무수한 전후 생존자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으면서, 죽음 충동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일종의 생물학적 관성(biological inertia)으로 보았다. 그는 죽음의 위협이 초래하는 공포에 전면적으로 노출된 바 있는 서유럽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상상은 일종의 본능적 도피처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왜 죽음이 도피처가 될까? 프로이트는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 앞에서는 성충동조차 한낱 부차적이고 성가신 욕구에 불과할 뿐이라고 설명한다. 이 모든 충동과 욕구를 아득하게 초월해 있는 완전한 무(無)로의 회귀에 대한 욕망이 죽음충동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공포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도 모두 근원적 차원에서 성립불가능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참된 평안을 죽음으로부터 찾으려는 무의식적 갈망이 죽음충동이라고 그는 규정하였다. 참으로 무신론자다운 죽음해석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지젝 역시 신과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죽음 충동의 정체를 해명하기 위해 기독교적 개념인 불멸성(immortality)을 차용한다. 지젝의 인간 이해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적이다. 그런데 어떻게 불멸성이라는 개념이 그의 인간 이해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지젝이 해명하는 불멸성은 내용상 기독교의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의 영혼이 존재적 실재로서 불멸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정신이 유한한 삶 너머의 무한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불멸성 개념과 유사하다.

분노의 질주 8
▲슬라보예 지젝. 라캉의 논의를 힘입어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 개념을 재해석한다.
유한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의 정신이 무한(infinity)을 바라볼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가장 명확하게는 극도의 불안감이 동반된다. 유한성으로 둘러싸인 사람이 무한을 직시할 때, 그로부터 유래되는 막대한 자유가 정신을 짓누르게 된다. 어떠한 규준도 부여할 수 없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자유를 엿보게 될 때, 그 심연과도 같은 무규정성이 사람의 정신을 사로잡게 된다. 여러가지 생물학적, 물리적, 환경적, 문화적 조건들로 제한돼 있는 사람의 삶과 전적으로 괴리되어 있는 낯선 신비가 바로 불멸성의 정체로 밝혀진다.

키에르케고르는 불멸성을 절대적 불안의 심리와 연관지어 설명했다. 지젝은 불멸성에 결부된 이런 불안의 심리를 적극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한한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적 쾌감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지젝에게 죽음 충동이란 불멸과 무한을 향한 정신의 지향이 낳은 결과물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 충동이 사람의 정신에 극단적으로 상충되는 두 가지 감정을 수여한다고 믿는다. 한쪽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유와 공허함의 무게에 대한 불안이 엄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갑갑한 삶의 제약들을 해체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죽음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죽음은 오히려 무목적성에 가깝다. 사람은 죽음을 통해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모든 종류의 삶의 목적들로부터 해방된다. 전통적이고 획일적인 가치들의 해체를 가장 완벽하게 실현시키는 사건이 죽음이다.

그래서 지젝의 눈에는 바로 오늘날의 세계 문화가 죽음 충동을 역사상 가장 명료하고 진솔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실존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도 하에, 보편적 가치를 해체하고 삶의 개별성을 보존하는 세태가 일상적 시대정신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목적없는 죽음, 공허한 죽음이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죽음의 모습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주연배우의 허망한 죽음을 힘입고 흥행에 성공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폴 워커의 죽음이 영화 전반에 오버랩되는 가운데, 관객들의 정신은 잠시나마 불멸과 무한을 향한 그들 내면의 욕망을 엿보게 된다. 인기, 명예, 부(富)와 같은 피상적 가치들이 무화되고, 오직 무목적적 자유를 향한 질주만이 마음을 채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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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하고 비극적인 죽음 때문에 불멸의 예술혼을 대표하는 전설로 남은 예술가 및 스타들. 위 왼쪽부터 스티븐 포스터, 반 고흐, 모딜리아니, 이사도라 덩컨, 어네스트 헤밍웨이, 아래 왼쪽부터 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넌, 커트 코베인, 히스 레져.
이는 문화예술계 전반의 공통된 현상이다. 스티븐 포스터(Stephen Foster, 1826-1864),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1877-1927),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제임스 딘(James Dean, 1931-1955),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 존 레넌(John Lennon, 1940-1980), 커트 코베인(Kurt Cobain, 1967-1994), 히스 레져(Heath Ledger, 1979-2008).

여기에 나열한 이름들은 모두 자신의 자유분방한 예술혼을 허망하고 비극적인 죽음의 운명과 '동기화'시킨 인물로서 문화예술계의 전설로 남은 자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현대무용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이사도라 덩컨은 두 자녀를 자동차 사고로 잃었을 뿐 아니라, 본인도 부가티 스포츠카를 탔다가 목에 맨 긴 스카프가 뒷바퀴 축에 감겨 목이 부러져 사망했다. 제임스 딘은 폴 워커와 같이 영화배우인 동시에 레이서였고, 과속질주를 자주 즐기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질주와 초월: "여긴 천국이야(This is heaven)."

죽음 충동과 불멸성, 그리고 무목적성에 얽힌 심리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았으니, 이제 영화 <분노의 질주>로 재차 시선을 옮겨 보자. 전편에 언급한 바 있듯, 영화의 핵심 소재이자 주제는 '달리는 것'이다. 소재와 주제가 동일한 이유는 주제에 이렇다 할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가족애나 테러와의 전쟁 등은 자동차 질주를 보다 스펙터클하게 표현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최대한 죽음을 절감하게 하는 질주를 선보이기 위한 부차적 명분일 뿐이다. 하바나의 스트리트 레이싱 장면, 뉴욕에서의 추격 장면, 그리고 러시아 빙판에서 잠수함과 대결을 벌이는 질주 장면, 이 세 장면이 영화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어린 아들이 인질로 잡혀 강제적으로 테러리스트를 돕는 도미닉을 검거하기 위해, 정보요원 미스터 노바디(Mr. Nobody)는 도미닉의 레이싱 팀 동료들을 초대형 압류차고로 데려간다. 동부 해안에서 압류한 마약상들의 초고성능 자동차 수백대를 모아 놓은 이 곳을 보는 순간, 팀 동료들은 말한다. "여긴 천국이야(This is heaven)."

분노의 질주 8
▲<분노의 질주 8>의 압류차고 장면. 수백대의 고성능 차량을 보고 팀원들은 말한다. “여긴 천국이야.”
이는 물론 관용적인 표현이지만, 동시에 이 영화의 정신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영화 주인공들에게 자동차는 불멸과 초월을 엿보는 길이며, 무한한 해방감을 선사하는 도구이다. 물론 정지해 있는 자동차는 의미가 없다. 오직 처절하게 달릴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 질주하는 자동차가 그들의 정신을 삶과 죽음의 위태로운 경계선상에 세워놓을 때 비로소 자동차는 천국을 향하는 길이 된다.

다시 말해 영화의 플롯은 핵무기 테러를 저지하거나 인질로 잡힌 가족을 구하는 등 거창한 목적들을 제시하지만, 그 종국은 '죽도록 달리는' 것으로 귀결된다. 목숨을 내놓은 경주 이외의 목적들은 어떻게든 최고 속도로 달리는 일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곁들여져 있다.

그리고 이처럼 죽음을 벗삼아 달리는 데는 실상 아무 목적이 없다. 플롯의 허황됨이 이를 방증한다. 전투기도 아닌 자동차가 열추적 미사일을 따돌리고 핵무기 탑재 잠수함을 파괴하는 극도로 기괴한 스토리는, 레이싱 이외의 다른 목적들이 모두 허구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이 철저한 무목적성 때문에 <분노와 질주> 시리즈는 진정한 킬링타임용 영화로 남게 된다. 불분명한 이유로 자살행위에 가까운 레이싱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감정적 여운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런 특성이 포스트모던 문화가 추구하는 자유와 해방, 그리고 초월의 진면목이라 볼 수 있다. 탈이성적인 것, 왜곡된 것, 감각적인 것을 통해 극도로 무의미한 재미를 추구하는 행위조차 유의미한 것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포스트모던 문화의 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유한성의 절대적인 벽에 가로막힌 상태에서 조소(嘲笑)와 환멸의 정서를 표출하기 위해 죽음을 희화화하고 초월을 격하시키는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주된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초월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도 고유한 초월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러나 무목적적 혹은 탈목적적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성은 초월을 향한 숭고한 종교적 목적들을 해체한다.
 

분노의 질주 8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 해소되지 않는 욕망의 표출을 위해 아무 목적없이 계속 달리는 주인공 포레스트.
목적없이 달리고 그로부터 삶의 해방을 획득하는 <분노의 질주> 등장인물들의 행태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에서 3년 2개월 동안 하염없이 달리는 주인공 포레스트(톰 행크스Tom Hanks 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직전의 포레스트는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부, 인기, 명예, 경력 등 어떤 부분에서도 부족함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친구이자 연인인 제니(Jenny, Robin Wright 분)만은 늘 바램과 달리 그의 곁을 떠나 있다.

결국 제니와의 사랑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자 포레스트는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달리기를 시작한다. 그의 질주는 마음이 완전히 닳아 소진되어 버린 순간, 극도로 지쳐버린 순간 끝을 맺는다.

이처럼 삶의 괴로운 순간들을 소진해 버리기 위해, 구체적 고민들을 망각하기 위해 아무 목적없이 죽음을 곁에 두고 달리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오늘날의 문화적 세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죽음의 쾌감: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눅 8:33)"

프로이트 이전까지 서구에서는 죽음충동의 표출을 위한 질주 욕구가 일종의 정신적 질환으로서, 사람을 훼방하는 외부적인 힘의 작용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의 기원은 당연히 성경이다. 예수께서 사역하던 당시에도 정신질환은 귀신의 힘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복음서 기록 중에는 예수께서 스스로를 "군대(λεγεών)"라 명명한 다수의 귀신들(δαιμονίων)을 사람에게서 쫓아내고, 이들이 돼지떼로 옮겨가 바다로 질주해 자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λεγεών은 로마제국 기준 대략 5-6천 명 가량의 군부대 단위를 말하는데, 기록대로라면 이들은 상징적으로만 아니라 실제로도 스스로를 λεγεών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린(Joel B. Green)의 주석에 따르면, 이들은 예수에 의해 패퇴하는 과정에서도 마치 일개 군을 통솔하는 지휘관과 같이 패전 및 퇴각협상을 시도함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이 λεγεών에 있음을 명시한다.

분노의 질주 8
▲<분노의 질주 8>의 러시아 빙판 질주 장면. 죽음을 곁에 두고 떼지어 질주하는 모습이 돼지떼의 질주를 연상시킨다.
이 퇴각협상 다음의 대목이 더 중요하다. 저명한 고대 역사가 버보벤(Koenraad S. Verboven)은 예수께서 이 λεγεών을 돼지에게 가도록 허락한 것과 돼지들이 집단으로 질주해 자살한 원인을 당시 로마제국의 전통과 관련해서 해명한다.

고대 로마제국은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엄숙한 장례를 거행하고 공식적으로 정해진 위령비를 세워주는 것을 중요한 국가적 의무로 여겼다. 그러나 이 λεγεών은 그런 명예를 얻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예수를 피하기 위해 하등한 동물로 여겨지는 돼지에게로 도망하는 처지가 된다. 당연히 받아야 할 존경과 명예를 획득하지 못한 채 돼지의 몸을 입은 군인들의 절망적인 심정은 그로부터 밀려오는 수치감을 벗어나기 위한 죽음 충동을 유발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죽음을 향해 내닫는 돼지떼의 질주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버보벤은 해석한다.

거라사 광인과 돼지떼의 질주 기사에 대해서는 신약학적으로도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영화 <분노의 질주>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학적 관점의 해석이 오히려 더 유효할 수 있다. 고대 서구에서 죽음 충동을 표출하고 충족시키기 위한 질주 행위는 정신질환의 한 증상으로, 현실의 처지에 대한 불만족과 그로부터 유발되는 수치심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자해 및 자살의 한 과정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버보벤의 해석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지젝의 죽음충동 해석에도 이런 고대적 이해의 잔향이 남아 있다. 이들은 죽음충동이 모든 실존적 욕망의 굴레로부터 완전하게 도피하려는 갈망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 정신분석학의 해석은 이 죽음충동이 단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방어적 측면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충동을 추구하고 표출하는 데서 오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쾌감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죽음충동과 질주본능에 대한 고대적 이해와 차이를 보인다.

분노의 질주 8
▲달리면서 죽어가기. <분노의 질주 8>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죽음 곁에 서서 현실도피의 쾌감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저렴한 초월 욕망을 표적삼아 흥행에 성공하였다. 현재 전망으로 <분노의 질주 8>은 북미를 제외한 해외에서 1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영화 역사상 해외에서만 1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할리우드 영화는 <아바타(2009)>, <타이타닉(1997)>, <분노의 질주 7(2015)>,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 <쥬라기월드(2015)> 다섯 편 뿐이다. 여기에 <분노의 질주 8>이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해외 흥행에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품 두 편이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속해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과속 레이싱으로 인한 주연배우의 죽음이 이 영화의 흥행력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 자체가 죽음 충동이 주는 쾌감을 자극하는 데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초월이 엄숙한 신비가 아니라 저렴한 극적 카타르시스의 소재가 되는 현실이 사뭇 답답할 따름이다. 우리 정신의 심처에 자리잡은 초월을 향한 지향의 힘은 진리를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데, 영화 속에 점철된 죽음과 초월의 조작된 이미지는 극적 쾌감을 유도하는 가운데 정신의 참된 힘을 소진시키고 있다.

죽음과 초월이 킬링타임을 위한 단편적 소비행위 속에 갇혀있는 오늘날 대중문화의 세태 속에, 과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존재할까?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