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폐쇄된 우주정거장 내부에서 외계생명체와 혈투를 벌이는 영화 <라이프>.
올 4월 극장가는 3월부터 시작된 비수기 흥행 가뭄이 연속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디즈니사의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 실사 영화와 <프리즌> 두 작품을 제외하고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기대작이었던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Ghost in the Shell)>이 북미 및 월드와이드 흥행에 참패했다는 아쉬운 소식도 들려온다.

이런 와중에 지난 5일 개봉한 영화 <라이프(Life)>가 잠시 <미녀와 야수>, <프리즌>에 이어 박스오피스에서 강세를 보였다. '생명'이라니. 제목부터가 심상찮아 살펴보니, 외계 생명체에 관한 영화이다.

그러고 보면 올 4월과 5월은 유독 외계 생명체의 위협이 극장가의 이슈가 될 기미가 엿보인다. 5월 9일에는 외계인 영화의 거장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에일리언: 커버넌트(Alien: Covenant)> 개봉이 예정돼 있다. 2012년 개봉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이후 약 5년만에 재차 외계인의 존재에 대하여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작품들을 관람할 기회가 온 것이다.

기억에서 잊혀질 만하면 보다 향상된 시나리오와 특수효과를 장착하고 돌아오는 외계인 및 외계 생명체에 대한 영화들. 이런 작품들이 서사와 시각화 측면에서 보다 정교해지면 질수록, 대중문화 속에서 기독교적 세계관과 구원론이 설 자리는 사라져 간다.

에일리언의 추억: "외계인을 지구로 데려올 거에요?"

1979년 개봉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일리언 1(Alien 1)>을 본 관객이라면, <라이프>를 관람할 때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에일리언 1>과 마찬가지로 <라이프>에서도 우주선 승무원들이 미지의 외계 생명체를 획득하고, 이 생명체가 승무원들을 숙주 혹은 양분삼아 성장한다.

우주선 내의 폐쇄된 환경은 긴장과 공포로 충만해진다. 비교적 순탄하게 외계 생명체를 처리할 기회도 주어지지만, 내부의 적에 의해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한다. 결국 영화는 <13일의 금요일(Friday the 13th)>에서나 볼 수 있는 슬래셔(slasher) 장르의 공포 분위기 조성 공식을 따라가며, 단 한 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모든 승무원들을 무자비한 죽음으로 이끈다. 이처럼 서사 구조 및 배역 설정 측면에서 본 <라이프>는 작품 전체가 <에일리언 1>에 대한 하나의 명백한 오마주(hommage)이다.
 

라이프
▲1979년작 <에일리언 1>의 외계 생명체. 이후 적대적 외계 생명체의 대명사와 같은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 두 작품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승무원들에 대한 감정이입은, 관객이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필수적 장치이다. 이 장치는 외계 생명체가 가진 극단적으로 혐오스럽고 기괴한 모습에 의해 그 효과가 크게 증폭된다.

이를 위해 <라이프>는 서양인들이 혐오하는 문어형 외계 생명체를 등장시킨다. 이처럼 비교적 '안전한' 흥행공식을 따르는 까닭에, 에일리언 시리즈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라이프> 자체의 서사로부터 큰 감흥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틀린 냉소주의를 반영하는 반전 결말은 신선한 느낌을 준다. 대개 이런 류의 작품들은 등장인물들의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외계 생명체의 위협을 지구로부터 몰아내는 결말을 제시한다. 동종의 작품들 중 상대적으로 최근의 개봉작인 <프로메테우스(2012)>도 이런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라이프>는 이 오래된 서사의 공식을 뒤집어, 외계 생명체에 의한 인류 멸망을 예보하는 것으로 영화의 막을 내린다.

전체적으로 보면 <라이프>는 에일리언 시리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 해서 이 영화가 클리셰로만 가득한 볼품없는 작품은 아니다. <에일리언 1>은 외계인을 다루는 Sci-fi(science fiction) 영화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꿔놓은 혁명적 작품이었다. 에일리언 시리즈는 외계인과 외계 생명체를 단순한 오락영화의 소재에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의 테제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의 Sci-fi 영화들에 행사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에일리언 1>에 필적할 만한 작품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E.T.(1982)‘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에일리언 1>이 적대적이고 공포스러운 외계인을 선보이는 Sci-fi 영화의 선구자라면, ‘E.T.’는 외계인과 사람들 사이의 우호적이고 낭만적인 소통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외계인에 초점을 맞춘 Sci-fi 영화는 이 두 작품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라이프>가 에일리언 시리즈의 서사적 도식을 답습했다 해서 그 작품성을 전면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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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작 <라이프>의 외계 생명체인 Calvin. 이후 적대적 외계 생명체의 대명사와 같은 이미지를 형성한다.
외계 생명체 존재증명: "분명히 생물체야... 지구의 유기체처럼 세포핵도 보여."

지구 바깥에 생명체가 존재할까? 이는 사람이 천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상고 시대부터 제기되어온 물음이다. 성경, 그리고 이 성경을 해석하는 교회의 권위를 인정했던 사상가들, 대표적으로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the Great),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은 외계 생명체나 외계 지성체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들의 주장은 목적론적(teleological) 성찰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인류를" 약속의 자녀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인류 이외의 지성체의 존재는 신의 창조 목적에 위배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반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로부터 시작해 플루타르코스(Plutarch), 중세 신비주의 신학자인 쿠사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근대 영국 경험론자 로크(John Locke), 독일 선험론자 칸트(Immanuel Kant), 네덜란드 천문학자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 등은 외계 생명체 및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수긍하는 편에 섰다.

이들은 신이 우주 만물의 운행에 인격적으로 개입하는 분이 아니라, 단지 무인격적인 원리를 부여하는 분이라는 데 공감하였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하고 번성했다면, 동일한 원리로 운행되고 있는 저 광활한 우주 어느 지점에 생명체 혹은 지성체의 탄생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근대까지 외계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논란은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적 법칙 사이의 대결구도 안에서 반복적으로 재점화되곤 하였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현재는 자연과학계 내부적으로도 외계 생명체의 존재가능성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게 나뉘어 있다.

여기에서 결정적 변수가 되는 것이 천체 관측 기술 수준이다. 우주의 크기는 우리 인류가 생각해 왔던 수준을 월등히 초월해 있다. 현재 우주의 크기는 직경이 약 940억 광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도 우주 전체의 크기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인류가 희미하게나마 측정 가능한 수준이 거기까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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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이 발달한 서구에서는 일찍이 외계 생명체, 특히 외계 지성체의 존재에 대한 기대감이 문화 전반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직 우주에 대한 관측기술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지 못한 시절, 정확히 말해 1990년 이전에는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가진 행성의 수가 우주 전체에 수백억 개가 넘는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1990년 허블 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이 지구 대기권 밖 궤도상에 안착하면서, 우리 태양계 바깥의 항성(fixed star)과 행성(planet)에 관한 관측의 수준과 범위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행성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골디락스 존: "캘빈도 살려면 산소가 필요해."

외계 생명체 발견을 시도하기 위해 해결돼야 할 두 가지 선결 과제가 있다. 첫째는 '생명체'의 정의(正意)를 내리는 작업이다. 둘째는 해당 생명체와의 접촉 방식을 결정하는 일이다. 세부적으로는 끝도 없는 논란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일단 일반적인 규정에 따라 생명체라는 것을 세포(cell), 박테리아(bacteria), 바이러스(virus) 형태로 존재하는 유기체로서, 자발적 섭생(攝生)활동이 가능한 모든 존재자로 규정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지구 내부의 극한 환경에서는 생명체의 분포 정도가 희박하다는 사실을 목격해 왔다. 그리고 우주 공간이나 달 표면과 같이 더 극단적인 지구 바깥의 환경에서는 생명체가 아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 왔다. 우주 전체가 유사한 원리로 작동한다고 가정한다면, 지구 바깥에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구와 유사한 환경조건을 갖춘 행성이 존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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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디락스 존.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수준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런 행성은 지구와 마찬가지로 암석형 행성(지구형 행성,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대표적)이어야 한다. 암석형 행성이란 행성 표면이 상온 상태에서 고체 상태를 유지하는 암석과 금속 같은 물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행성을 말한다.

그리고 적당한 수준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공전궤도가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골디락스 존이란 행성 표면의 온도가 지구와 같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지역으로, 항성과 행성 사이의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 즉 암석형 행성이 항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공전하고 있어야 한다. 이 행성은 적당한 속도로 자전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 행성의 한쪽 면은 영구적 고온지대가 되고, 반대 면은 영구적 극저온지대가 된다.

여기에 물, 즉 수분이 있어야 한다. 생명체가 발생하기 적당한 온도와 수분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안정적 대기(大氣)가 필요하며, 이 대기를 붙들어놓을 만한 적당한 수준의 인력과 자기장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성의 크기가 지구와 대비해서 과도하게 크거나 작아서도 안 된다.

우리 태양계 바깥에 존재하는 암석형 행성의 직접적인 관측은 앞서 말한 허블 우주망원경의 설치 이후에야 가능해진 것으로, 장구한 천문학 역사 속에서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암석형 행성은 일반적으로 가스형 행성(목성형)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지표면에 존재하는 우주망원경으로는 직접적으로 관측할 수 없었다.

이처럼 관측기술이 발전하면서 외계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전망은 급격하게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 이전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행성계들이 우리 태양계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골디락스 존 내에 수많은 암석형 행성들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관측으로는 골디락스 존 내에 대부분 목성처럼 거대한 가스형 행성이 공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 태양계와 같이 항성과 가까운 곳에 암석형 행성이 공전하고, 먼 곳에 가스형 행성이 공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즉 우리 태양계의 구조가 일반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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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표면 상상도. 한시도 쉬지않고 내리치는 거대한 번개들, 끝없이 펼쳐진 액체수소 바다, 번개 외에는 빛을 찾아볼 수 없는 어두움, 극저온의 대기가 목성 표면을 뒤덮고 있다. 이처럼 가스형 행성에는 생명체가 절대 살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골디락스 존에 거대 가스형 행성이 존재하는 경우, 같은 골디락스 존 내에 위치하는 자그마한 암석형 행성들은 인력 때문에 이 가스형 행성에 삼켜지거나 행성계 바깥으로 축출된다. 가스형 행성에는 가공할 수준의 자기장과 인력, 그리고 방사능이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체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아울러 가스형 행성의 특성인 빠른 자전주기 때문에 대기가 극도로 불안정하여 항성의 빛과 온도가 표면에 도달하지 못한다. 즉 행성의 대기가 극저온 상태이므로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목성의 예를 들어보자. 목성의 대기 중에는 항상 시속 수백 킬로미터의 바람이 불며, 평균 섭씨 영하 235도의 극저온 상태가 유지된다. 목성의 구름대 내부에는 불안정한 대기 상태와 막강한 전자기장 때문에 끊임없이 거대한 번개가 친다. 번개 하나하나의 크기가 대략 지구의 아메리카 대륙만 하다(비유가 아니라 실제 크기를 말한다).

구름대 아래 목성 표면대기압은 지구 표면대기압의 약 20만배(20만 기압)에 이른다. 이 거대한 압력 때문에 목성 표면에는 수소가 액화되어 흐르고 있다. 지구 표면적의 120배에 이르는 광활한 공간이 모두 액체수소의 바다로 덮여있는 것이다. 이런 가스형 행성이 골디락스 존을 점거하고 있는 항성계에서는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우주 내 행성계 대부분은 골디락스 존 내에 거대 가스형 행성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미지와의 조우: "접촉해 볼게... 계속 접근만 하고 피하진 않네."

과학이 발전할수록, 천체 관측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형태의 외계 생명체를 발견할 가능성은 급격하게 희박해지고 있다. 과학계 내부에서는 이미 SETI(the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즉 외계 지성체 탐색에 대한 회의론이 지배적 분위기가 된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중문화는 이토록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집착할까? 에일리언 시리즈가 40년 가까이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라이프>와 같은 작품들이 몇 년을 주기로 반복적으로 제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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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생명체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확인되는 초월적인 타자와의 만남에 대한 갈구는 사람의 존재적 본성이다.
외계 생명체 혹은 지성체를 다룬 영화가 대중의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욕구를 단지 상상력 충족의 욕구라고 단정짓지는 말자. 상상력은 외계인 말고도 다른 것들에 의해 충족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외계 생명체를 다룬 Sci-fi 영화에 얽혀 있는 대중의 욕구는 타자 인식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증하려는 본능적 요청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사람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타자는 사람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역설한 바 있듯, 사람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과 맺는 모든 관계가 완전하게 단절되는 경우는 오직 죽음뿐이다. 즉 자기 존재를 확증받으려는 욕구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직면하는 데서 유래된다.

우주는 넓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넓다. 우주의 광활함에 대한 인지는 인류의 자기정체성에 큰 혼란을 가져온다. 아직 우주의 크기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채 지구의 광활함에 경탄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고대나 중세에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6-17세기 서구 과학혁명을 거쳐 천체에 대한 지식이 자라면서 공포스러울 정도로 확장된 우주의 크기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인간 이해에 커다란 균열을 초래하기 시작하였다.

우주 전체에 비하면 인류와 지구 생태계는 가히 티끌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세한 권역에 갇혀 외로이 존재하고 있다. 우주 전체로 보면 극도로 희귀한,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방식들(생명)이 우리 지구에 펼쳐져 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소중한 것이라고 봐야겠지만, 한편으로 우리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게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이 절박한 전 지구적 외로움은 자기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한 전 인류적 불안과 얽히는 가운데 지구 바깥에 거주하는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그 태도가 우리에게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외모가 아름답든 혐오스럽든 간에 일단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래야 우리 인류가 고독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외계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우리 인류와 지구 생태계의 존재방식을 초월해 있는 존재, 신비한 존재로 추앙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외계 생명체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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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지성체 탐구(SETI)를 주제로 한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등의 흥행작으로 유명한 거장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 감독의 1997년작 <콘택트(Contact)>에는 이런 정서가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엘리(Ellie, Jodie Foster 분) 박사는 SETI에 인생을 건 천문학자이다. 외계인이 보낸 전파 신호를 통해 외계지성체의 존재를 확증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녀는 한 파티에서 가톨릭 성직자 죠스(Joss, Matthew McConaughey 분)를 만나 다음과 같이 묻는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후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증거를 남기지 않으신 걸까요? 아니면 사실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데 단지 우리(인류)가 스스로 너무나 하찮고 외롭다고 느끼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만들어낸 걸까요(An all-powerful God created the universe, then decided not to give any proof of His existence? Or that He doesn't exist at all and that we created Him so we wouldn't feel so small and alone)?"

존재론적 위로: "저 추잡한 인간들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아."

<콘택트>에서 엘리 박사가 냉소적으로 진술하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기독교는 전 인류적 외로움과 불안이 곧 사람의 유한성에 대한 반성과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종교에 관하여(Über die Religion)>에서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광대한 우주를 향한 직관이 수여하는 자기존재의 절대적 하찮음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이 무한자(das Unendlich)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Gefühl der Abhängigkeit)을 일깨운다고 밝혔다.

성경은 유한자(das Endlich)인 사람이 무한자인 하나님께 내보이는 이같은 겸비와 숭앙의 정서를 곳곳에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사람이 티끌만도 못한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극한의 유한성과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친다.

즉, 서구적 차원에서는 외계 생물체에 대한 갈망의 역사적 뿌리를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전 우주에 비하면 하나의 점 취급도 받지 못할 지구에 거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모두 어느 한 순간 점멸해 버리는 지극히 희미하고 불안한 생을 산다. 이런 자각은 곧 초월적 타자, 즉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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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에서 외계 생명체가 적대적이고 위협적일 가능성을 예상하고도, 외계 생물체 실험에 참여한 승무원. 외계인에 대한 서구인들의 무한한 호기심과 탐구욕을 대변한다.
외계 생명체를 다루는 Sci-fi는 바로 이런 사람의 본능적 바램을 상업적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 ‘E.T.’의 귀여운 외계인이나 <어벤저스(The Avengers)>의 정의로운 토르(Thor)와 같이 사람에게 극히 우호적인 외계인으로부터 <에일리언>, <프레데터(Predator)>, <라이프> 등에 등장하는 혐오스럽고 적대적 외계생명체들까지 모두 우리를 소외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라이프>에 등장하는 외계인 캘빈(Calvin)은 인류 전체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거대한 위협이다. 그렇지만 막상 영화 내에서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에게는 삶에 대한 열망을 극대화하고 인류의 존재의미를 절박하게 성찰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라이프>의 프로타고니스트 조던(Jordan, Jake Gyllenhaal 분)은 시리아 내전에서의 지옥 같은 경험 때문에 인류의 죄에 대해 특유의 염세적 태도를 고수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외계생명체 캘빈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끝내 자기를 희생하는 결단을 내린다. 물론 그의 의도는 결말에서 아이러니하게 무산되지만 말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조던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 적대적 외계 생명체로부터조차 일종의 가상적인 존재론적 위안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외계 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전망은 확신을 잃어가고 있다. 어쩌면 이 우주에 우리 지구 생태계 하나밖에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공간이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외계 생명체 영화에 대한 심정적 의존도를 높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토록 불안하다면, 발견되지도 않고 접촉할 수도 없는 외계 생명체에 대한 환상에 기대기보다는, 차라리 성경, 교회, 영감, 그리고 기도응답의 체험으로 지지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기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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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지구 궤도에 안착한 허블 우주망원경. 외계 생명체 존재에 대한 기대감을 무산시키는 데 주로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