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영을 좇아 행함이란?

입력 : 2017.02.23 18:49

이경섭 응답하라 개혁신학
▲이경섭 목사.
알미니안이나 신인협력론자들이 그들의 논거를 대려고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에는 행위에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성령, 믿음 같은 것들도 무리하게 행위 규범의 논거로 삼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다음 내용 역시 그들의 신인협력 논리를 펼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오는 구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들은 이 구절을, 죄인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하나님 편에서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 위에, 인간 편에서의 "영을 좇아 행함"을 첨가해 완성시킨다는 신인협력론의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내어줌'과 '영을 좇아 행함'은 율법 완성을 위한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 분담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줌으로 완성됐으며, 인간이 거기에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습니다.

'영을 좇아 행함'은 아들의 대속으로 이룬 율법적 의를 수납하는 '믿음'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믿음보다 영적인 일은 없고, 믿음을 좇는 것 이상의 영적인 추구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성령의 일로 규정합니다(갈 5:5; 살후 2:13). 그러나 반대자들이 율법은 말 그대로 법이니, 막연한 믿음 같은 것 말고 더 확실한 법적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다면 "믿음이 바로 법이다. 믿음의 법으로 이다"(롬 3:27) 라고 응수하면 됩니다.

'믿음'은 율법을 이루는 유일한 법이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롬 8:2). 최후의 재판정에서 우리의 의를 변호해줄 법은 오직 믿음입니다.

만일 '영을 좇아 행함'을 아들의 대속에 첨가해야 할 행위로 만든다면 그것은 율법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혹은 '영을 쫓아 행함'이라는 영미(靈味)어린 용어의 뉘앙스에 붙들려, 그것은 적극적인 율법 행위가 아닌 말 그대로 '영을 좇는 것'이라 강변할지라도, 칭의에 부응하려는 한 율법주의입니다.

혹은 '영을 쫓아 행함'을 내면화·신령화시켜 성령 주도의 피동적인 것으로 포장해도, 이 역시 율법주의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습니다. 이는 칭의를 이미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보다는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 의존시켜, 칭의를 현재진행형의 미완성품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뷰캐넌(James Buchanan. 1804-1870)의 지적도 같은 우려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으로 대치하는 것만큼 비성경적이고 그것 자체로 인간의 영혼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일은 없다. 그가 아직 세상에 계시기도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근거하여,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일에 근거하여 전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미 종결되어진 사역에 근거해 완전한 확신 가운데 안식하며, 이미 성취되어진 의에 기초해서 안식할 수 있다. ...

이에 반해 우리가 만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근거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종결되고 용인된 것이 아니라, 중생 받지 못한 죄인의 경우 심지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행위에 희망을 걸고 의지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셈이다."

'성령을 좇아 행함'이 적극적인 율법의 행위이든, 혹은 성령 주도의 피동적인 행위이든 그것이 칭의의 조건인 한 율법주의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을 좇아 행한다"는 문장을 대할 때, '행함'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포커스를 맞춰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행한다'는 말은 '믿음'을 대신하는 용도로도 쓰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믿음을 종종 행위로 대치합니다. 히브리서 3장 18-19절은 '순종치 아니함(18)'과 '믿지 아니함(19)'을 상호 교호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주석가 레인(Lane)의 히브리서 3장 18-19절 설명을 들어봅시다.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 성경에서 자주 '믿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 의미로 사용됐다(히 5:9; 11:31; 신 30:20; 롬 1:5; 6:17; 10:16; 16:26; 갈 5:7). 이러한 불순종은 불신앙의 정점이고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민 14:23)이며, 반항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호크마 주석은,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를 '믿음'으로 해석합니다. "'마음으로 순종하여'는 바울이 로마서 10장 10절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본 구절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또는 '마음으로 믿어'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순종'이라는 단어에 너무 치중하면 인간 행위가 강조되므로, 바울이 그동안 강조했던 '믿음'과는 별개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루터 역시 기독교가 행위라는 단어에 접근할 때는 언제나 신중함을 견지할 것을 종용합니다. "루터는 신앙을 하나의 행위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가졌다. 그것은 특정 상황에서 허용될 수 있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 용례는 비성경적인 것으로 회피해야 한다." 루터가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경이 신앙을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행위' 개념이 '율법'과 연결돼 있는 반면, '신앙'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돼 있다고 생각했다. 칭의 교리 안에서는 신앙을 행위로 규정하는 것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 만일 누군가 신앙을 '행위'로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위인 한에서 의롭게 하지 못하는 모든 행위와 동일한 것이 적용될 것이다."

성경은 믿음이 행위가 아닌 신령한 영적 일임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 대조법들을 쓰고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 '행위와 율법(육신)'을 결부지어 믿음을 좇음을 성령을 좇는 것으로, 율법을 좇음을 육신을 좇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때로는 '믿음'과 '율법'을 대칭 구도로도 놓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갈 2:16)",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그러면서도 성경은 믿음이 율법을 이루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하며 믿음과 율법을 화해시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 9:30-31)".

이 등식대로면, 로마서 8장 4절을 '율법을 좇지 않고 믿음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로 바꾸어 쓸 수 있습니다.

이제껏 '영을 좇아 행함'이 '칭의의 법'을 이루는 '믿음'임을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여전히 '행함'의 의미 구현에 부족하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성화의 율법'을 이루는 '순종(선행)'의 의미를 첨가시키면 됩니다. 이는 '행함'의 의미도 살려낼 뿐더러, 나아가 율법주의, 신령주의도 피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영을 좇아 행함'을 '칭의의 율법'에 적용시킬 때는 '믿음'의 의미가, '성화의 율법'에 적용시킬 때는 '선행(순종)'의 의미가 담겨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율법 하면 보통 칭의의 법을 말하는데, 과연 성화 율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도 통념적인 칭의의 율법 외에 '자유의 율법(약 2:12)'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때, 이를 사용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의 율법'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과 말씀에 순종하므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성화 율법과 대동소이합니다.

계신대학원대학교 설립자이며, 탁월한 칼빈주의자인 이병규 박사의 '자유의 율법(약 2:12)'에 대한 해석은 성화 개념 그 자체로 보입니다. "자유의 율법은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곧 중생한 영이 진정으로 자원해서 사람을 사랑하며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

이 법은 율법에 위반되지 않지만 자유의 법 곧 영의 법에 위반되는 것이 있다. 예컨대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 연보를 하되 단 마음으로 하지 못하는 것, 구제를 하되 사랑으로 하지 못하는 것 등과 같은 것이다."

이병규 박사가 '율법에는 위반되지는 않지만 자유의 율법에는 위배될 수 있다'고 한 것은, 구원받은 신자의 행위가 칭의의 법을 이루거나 거스리지는 않지만, 성화의 율법을 거스리거나 성취할 수는 있다는 뜻입니다.

즉 구원받은 성도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성화의 법을 이룰 수 있고, 반대로 나태하거나 방종하면 성화의 법을 거스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의 행위가 칭의의 법을 이루거나 거스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노아(창 6:9), 다니엘, 욥(겔 14:20) 같은 사람을 의인(義人)이라 칭함은, 로마가톨릭이나 칭의 유보자들의 주장처럼 칭의의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그들이 잉여의(剩餘義)를 산출한 만큼의 탁월한 순종으로 어마무시한 칭의적 의를 이루었기에(다른 사람에게 의를 나눠줄 만큼의 넉넉한 칭의를 이루었다는 뜻으로, 이는 성자급에만 가능하다고 보는 로마가톨릭 교리임) 의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칭의적 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의 차별 없이 동일하게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롬 3:21-22).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일념으로 말씀을 좇아, 전심어린 순종의 삶을 살았다면-그가 얼마나 완벽하고 많은 선행을 했는지를 불문하고-그는 성화 율법의 측면에서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강조컨대, 노아, 다니엘, 욥 같은 사람에게 붙여진 '의인(義人)'이라는 칭호는 남다르게 칭의 공로를 크게 세운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니라 성화적 차원에서의 의인입니다. 이신칭의 받은 성도의 선행(善行) 의의를 규정한 존 맥아더(John MacArthur)의 언급은 탁월합니다.

"신자의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이 죄를 사하거나, 칭의를 얻는 공로가 될 수 없지만, 그 불완전한 행위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대로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게 되는 근거가 된다.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컵을 제공한 것조차도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

행위는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일에 있어서는 필요하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과는 별개의 일이다. ... 칭의 이후의 행위도 역시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죄성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상급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라고 항의할 수도 있겠지만, 죄책이 온전히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Justification by faith alone)."

그러나 칭의 받지 못한 자에게는 성화적 의가 불가능합니다. 이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그의 순종(선행)이 죄 빚을 갚기도 모자랄 뿐더러,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할수록 그는 더 죄인으로 드러날 뿐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성화 율법은 이신칭의 받아 율법에서 해방된 자에게, 복의 계수를 위해 주어진 축복의 언약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순종과 선행이 비록 흠결이 있고 불완전할지라고, 더 이상 그것을 정죄할 율법이 그에겐 없습니다. 이제 그를 지배하는 법은 흠결 있는 순종까지도 소담한 복으로 수확하게 해 줄 성화의 율법뿐입니다.

시편 기자가 율법을 복이요, 평생 사랑할 대상으로 고백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 119:127)".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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