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응답하라 개혁신학
▲이경섭 목사.
교회사에서 이신칭의가 공격을 당해 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19세기에는 계몽주의로부터, 17-18세기는 경건주의와 신비주의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는 로마천주교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유대교와 기독교가 혼재된 과도기의 초대교회는 신율주의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로부터 "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을 가르친 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요 6:35-7:1, 눅 5:19-25).

그 중 중세 로마천주교의 박해는 가장 집요하고 끈질겼으며, 그 공격은 오늘날 신율주의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시대 영국의 주교였던 휴 라티머(Hugh Latimer, 1485-1555) 와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 1500-1555)는 이신칭의 교리를 가르친 죄목으로 메리 여왕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The Prayer of the Lord; R. C. Sproul).

구약 시대에도 이신칭의의 싸움은 예외가 없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이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의 공격을 받고(갈 4:29), 믿음의 사람 야곱이 망령된 에서의 공격을 받고(히 12:16-17) 순교자 아벨이 가인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도(창 4:3-8; 히11:4; 요일 3:12) 이신칭의 때문입니다. 아더 핑크(A. W. Pink)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거부하신 일차적 근거가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고 왜곡한 때문"이라고 지적한 말에서도, 이신칭의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고 영과 육의 대척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이 그의 설교에서 신구약 시대를 망라하여 유대인들이 예수 믿어 구원 얻는 도리를 부정한 것을, 육에 속한 자들의 성령의 거스림으로(행 7:51)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염두에 둘 때, 근자에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는 이신칭의 논쟁 역시, 교회사에 늘 있어왔던 영과 육의 싸움의 연장선상으로 알고 지나치게 호들갑 떨 필요가 없습니다.

이신칭의는 박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해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능력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사에서 그렇게 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된 것은, 값 없이 구원해 주신 이신칭의의 감격과 부어진 성령(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의 능력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순교의 잔을 받잡게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교사화(殉敎史話)를 보더라도, 신율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칭의에서 탈락할까봐, 이를 악물고 박해를 견딘 경우는 드뭅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무명의 한 노인은, "나의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었소. 그러므로 나는 그를 위해 기꺼이 나의 목숨을 바치겠소"라며 순교했고, 165년에 참수형을 당한 변증가 유스티누스(Justine Martyr)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귀중한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한 공통된 고백이었습니다.

오늘 북녘 땅에도 이신칭의가 박해를 이기는 능력이 되고 있다 합니다. 몇년 전 한 통계에 의하면, 북한 지하교회 순교자는 1만 6천명 이상이며, 현재도 약 3-5만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갇혀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예배를 드리다 발각되거나 기독교인으로 확인되면 끌려가 혹독한 핍박을 당하는데, 그러한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산과 토굴과 골방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힘이 이신칭의(以信稱義)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신칭의 신앙을 폄하하는 일부 신학자들이 "이신칭의 신앙은 로마로부터 박해받던 초기 기독교 시대의 산물로,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시대에는 맞지 않다"는 말들을 하는데, 이신칭의를 특정 시대의 산물로 규정한 것은 오류이지만, 박해를 이기게 한 요인으로 꼽은 것은 옳습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이신칭의의 감격과 부어진 성령(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의 능력이 그들로 박해를 이기게 한 것입니다.

이신칭의를 성령의 교리라고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성령이 아니면 이신칭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에서입니다. 이신칭의는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으신, 거듭난 사람들이(벧전 1:3) 성령으로 고백하는 교리입니다(고전 12:3). 성경은 곳곳에서 '성령'과 '이신칭의(이신득구)'를 결부지으며, 이신칭의가 성령의 교리임을 밝힙니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나니(갈 5:5, 새번역)".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칼빈(John Calvin)은 그의 <기독교 강요(제Ⅲ권 성령론)>에서 "성령은 이신칭의를 계속 일으킨다"며 이신칭의가 성령의 일임을 주장했습니다. 아더 핑크(A. W. Pink) 역시 이신칭의 신앙이 성령의 인도로 된 것임을 확언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신칭의 교리를 가장 중요한 교리로 본 것은 그것이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은 교리인 때문이다." 계속하여 그는 초월적 계시인 이신칭의는 인간 지성으로 접근이 불가함을 역설했습니다. "이신칭의를 파악하는 데는 기도하는 영적 노력과 지성적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인간 사색 한계 밖의 하나님의 계시의 진술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 날마다 자신의 허물을 직면하는 인간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갖는 것은 합리적 지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데,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가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이는 로마교에서 주장하는, 의의 주입(a infusion of righteousness)으로 말미암은 '의로운 상태(righteous state)'의 경험과도 다르고, 소수의 성자 반열에 든 사람에게 신적 언질로 주어지는(예컨대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너는 의롭게 됐다'고 언질해 주는) 확신과도 다른,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확신입니다(살전 1:5).

예컨대 청교도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확신 같은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아무 값 없이 나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성령에 의해 나를 점진적으로 거룩케 하십니다.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그분의 영원한 품 안에 나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오, 이 복음적 진리의 복됨이라니! 이것이 정말 복음입니다. 이는 들을 귀 있는 모든 자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는 복된 소식입니다. 사단은 나릍 고소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주 예수님이 나의 의(義)가 되시는데 네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무엇이라 비난 하느냐?'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내 옷이 아니라 그분의 옷올 입고 서 있습니다."

신율주의자들이 입만 열면, 기독교인들의 방종 원인이 이신칭의 교리 때문이라 공격하는데, 이것도 오류임은 이신칭의에 개입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신칭의자에게 부어진 성령이 이후 그의 삶을 주도하여, 결코 그로 하여금 방종한 삶을 살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이신칭의자는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서(갈 2:20) 그의 삶을 하나님이 의도한 삶으로 이끌어,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는 말씀이 응해지도록 합니다.

성경이 참된 성도의 표징을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며, 자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한 것은, 성도의 삶이 성령에 의해 주도된다는 뜻입니다(빌 3:3). 영국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 1616- 1683)도 육신에 속한 성도와 영에 속한 성도의 구분을 자연인의 힘으로 사느냐, 성령의 힘으로 사느냐로 결정된다고 한 말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확인합니다.

"영과 육신의 구분은 성령의 인도로 된 것인지, 생래적인 기능의 힘에서 나온 것이냐 로 결정된다. 물론 여기서 성령으로 된다함은, 단순히 성령의 은사적 기능만 빌은 생래적인 기능의 힘과는 구분된다."

이와 달리 행위로 칭의를 이루려는 신율주의자들은 자신의 능력에만 집착합니다. 성령이 부재한 그들에게(갈 3:2) 의지할 것은 오직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행위에 집착하면서도 열매가 희귀한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성령 없는 자에게 따르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성령은 오직 믿음을 의지하는 자에게만 부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부어짐(the anointing of the Holy Spirit)의 전제를 믿음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신칭의)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믿는 자에게 부어진 성령이 이후 그의 삶을 이끌어 하나님이 그에게서 의도한 것을 이루고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합니다.

율법적 동기로 움직이는 신율주의자들이 순종할 능력을 갖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율법 자체가 가진 연약성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율법이 명령과 함께 행할 능력까지 주는 것처럼 오해합니다만, 오히려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의하면 율법은 사람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죄를 부추깁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8, 11)".

신율주의자들이 율법의 채찍으로 성화를 이끌어내려는 것은, 가라앉은 구정물을 휘저어 맑은 물을 만들어내려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은 죄의 먼지만을 일으키고 복음은 영혼을 깨끗케 한다"고 말한 청교도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말처럼, 율법적 두려움은 죄를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부추깁니다. 성화를 도모하려 율법을 들먹이는 순간, 은혜로 잠잠케 된 죄성이 깨어나 순종을 어렵게 만듭니다.

교회사적으로도 보면, 엄격주의를 표방한 율법주의 종교가 오히려 더 부패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강팍하여 남을 정죄하는 일에 더 빠르고 더 위선에 빠진 것이나, 금욕과 절제의 상징인 중세의 수도원 담장 안에서 부도덕한 일들이 횡행한 것이나, 회심의 증거(삶의 변화)에 지나치게 집착한 일부 과격 청교도들 중 정신이상자들이 생긴 점 등은 율법이 행할 능력을 갖다 주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성화는 이신칭의 복음을 통해, 그 심령이 은혜의 소금에 절여지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황량한 율법주의자의 심령에는 그 어떤 순종의 꽃도 피어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성화의 열매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이후부터 맺어졌다고 지적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골 1:6). 설사 누가 율법의 강요에 의해 유사한 열매를 낸다 할지라도, 은혜와 성령으로 맺어지지 않은 그런 짝퉁 열매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