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독립운동
▲학술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거나 순교한 성도에 대해, '독립운동가'로서 국가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단법인 아침과 김한표·이주영·이혜훈 의원 등의 주최로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제3간담회실에서는 '독립운동가 인준 청원을 위한 항일 기독교인들 재조명 학술토론회: 일제 신사참배 거부투쟁은 독립운동인가'가 개최됐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됐다 살아남은 성도들은 '출옥성도'로 불린다. 이들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항일운동으로 평가됐음에도, 아직까지 이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추서나 포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주최 측은 "주기철·손양원 목사는 훈장을 받았지만 나머지 출옥성도들은 일제의 온갖 회유와 고문 등에도 3-6년씩 투옥되고 심지어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까지 했지만 해방 72년이 지난 지금껏 올바르게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기존 국가보훈처 독립운동 공적심사위원들인 이만열·윤경로 교수 등이 기독교 장로인데도 진보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단순한 종교활동에 국한하고 때로 폄하해 왔기 때문"이라고 폭로하기도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 추서를 요청할 신사참배 거부운동가들 중 1차 대상자로 한상동 목사 등 장기간 투옥된 11명, 조수옥 권사 등 여성 거부운동가 6명, 최봉석 목사와 박의음·이현속 전도사 등 순교자 3명, 한부선(Bruce F. Hunt) 등 선교사 5명, 기타 항일독립운동가들 3명을 선정하고 '10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주기철 주광조
▲어린 주광조를 안고 있는 주기철 목사의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이날 학술토론회에서는 최재건 교수(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가 '일제 치하의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최덕성 총장(브니엘신학교 총장)이 '주기철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각각 발표했다. 이후에는 이정은 회장(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좌장으로 이은선 교수(안양대), 이명화 수석연구위원(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등이 토론을 펼쳤다.

최재건 교수는 한국교회 130년 역사상 '가장 큰 박해'였던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일제의 강요와 선교사 및 한국교회의 대응을 살핀 후,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대해 개관했다. 그는 "반대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의사를 피력했는데, 우선 주한 미국남북장로교, 호주장로교의 한국선교회들은 경영하던 학교를 폐교하고 교육사업에서 인퇴하는 식으로 저항했다"고 전했다.

최 교수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지역을 중심으로 몇 갈래로 진행됐는데, 평남의 주기철,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과 주남선, 전남의 손양원, 만주의 헌트와 김윤섭과 박의흠이 주축이었다"며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지역별로 조직화하여 거부운동을 전개하고,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교회의 출석을 막은 것은 물론 노회 부담금도 바치지 말고 아예 노회를 파괴하고 참배 거부자들로 새 노회를 구성하자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거부 이유에 대해서는 '신앙'과 '민족운동'을 꼽았다. 먼저 '신앙'에 대해 "그들은 신사참배와 천조대신 경배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영적 간음이라 믿었고,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십계명 중 1·2계명을 위배하는 것으로 믿었다"며 "또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했기에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탄압을 이겨냈고, 하나님 말씀의 증인이 되려는 사명의식과 순교에의 열정으로 타올랐다"고 소개했다.

'민족운동' 차원에 대해선 "신사참배는 한국인의 '황민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써 강요됐기에, 참배를 거절하는 일 자체가 항일행위였다"며 "총독부 당국도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자들에 대해, 종교를 앞세워 배일운동을 하는 '가면 쓴 행동'으로 단정했다. 일제가 한국교회를 핍박하고 탄압조치를 한 것은 교회가 민족운동을 한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한국 사학계에서도 이런 저항운동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봤고, 민족운동이 거의 고사됐던 당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의 배일 사상을 지탱해준 것은 강력한 신앙적 양심이었다"며 "한국교회는 종교입국의 동기에서 신앙을 받아들여 105인 사건이나 3·1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항일 운동의 전통을 이어왔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신사참배 문제는 아직도 활화산의 상태에 있다. 나치에 순응했던 독일교회가 2차대전 종결 후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했던 것과 달리, 한국교회는 총회의 결의로만 문제처리를 끝내는 면피성 행위에 그쳐 감정적 앙금과 근본 병폐를 해소하지 못했다"며 "신사참배 반대투쟁에 앞장선 인사들이 국가적으로 제대로 균형 있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가 충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한다"고 지적했다.

신사참배 독립운동
▲주제발표한 최재건 교수와 최덕성 총장(왼쪽부터). ⓒ이대웅 기자
이어 최덕성 총장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광복까지 한국 기독교인들이 전개한 정통 신앙운동이자,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시행과 권유운동에 맞선 저항운동으로서,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실시하기로 결의한 때부터 본격화됐다"며 "처음에는 소규모 기독교인들이 거부하고 항의하는 운동으로 시작했다. 1939년 여름부터 각 지역 중심의 저항으로 전개됐고, 1940년에 이르러 전국적 결속으로 연대하는 신앙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신사참배 거부운동교회로 발전해 '지하교회'로 존재했다"고 밝혔다.

최 총장은 "개인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와 달리, 한상동 목사와 이주원 전도사는 필사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전국 연결망을 만들고 결속을 강화하여 이를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구체적 방안을 마련했다"며 "이처럼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종교 영역을 넘어 일제 탄압에 항거하고 일제라는 국체(國體) 곧 국가의 실체를 부정하는 반국가·반체제 저항운동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원들을 체포해 '치안유지법, 보안법, 군기보호법'을 적용했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일제 국가조직을 궤멸하고 군국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천년왕국 건설운동으로 이해했다"고 전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새로운 교회 조직을 가지려고 한 것은 일제 궤멸과 천년왕국을 대비하는 작업이었고, 새 교회 조직은 반체제·정치적 저항·정치운동·비밀결사 운동의 성격을 지녔다. 일제는 종교국가였기에, 신사참배 거부는 곧 국가에 대한 정치적 항거였다"며 "신사참배 거부운동 사건으로 2백여 교회가 폐쇄되고 기독교인 2천여 명이 투옥됐으며 당시 50여 명이 순교했다"고 했다.

한상동 목사
故 한상동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최덕성 총장은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주기철의 순교의 동력은 오늘날 진보계 일각에서 '근본주의'로 폄하하는 개혁신앙·정통신학이다. 이 신념체계는 주기철에게 신사참배가 단순히 국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만적 해석과 주장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일제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신념을 제공했다"며 "성경에 등장하는 예레미야와 다니엘, 사무엘과 이사야 등이 신앙적 동기와 함께 민족적 동기로 예언사역을 한 것처럼,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도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했지만 항일투쟁에는 민족적 동기가 없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최 총장은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은 국체변혁, 즉 국가의 실체를 변혁시키는 '국가전복'을 시도한 반역자들로 처리돼 체포·조사·판결을 받았다. 이처럼 일제라는 실체를 부정한 것은 민족적 동기의 발로였다"며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신도교라는 종교적 제의에 대한 기독교적 거부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이데올로기인 '신도 민족주의(Shinto Nationalism)'에 대한 항거, 곧 항일투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일제 말기와 광복 직후의 한국교회는 민족정신과 직결돼 있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라는 애국·애족적 찬송을 합창한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애국운동과 동일시됐다"며 "주남선 목사는 광복군 군자금을 모금했고 그의 동생은 독립투사로 순국했으며, 한상동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전환시켜 종교국가에 저항했다. 출옥성도들이 펼친 광복 후 국산품 애국운동, 벨벳치마 거부운동, 외국산 카메라 거부운동 등은 애국애족 정신의 열매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보훈처는 신사참배를 개인적으로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고 포상했다. 손양원 목사와 황모 장로 등에게도 애국훈장을 수여했다"며 "그러나 다수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구성원들에 대한 포상은 지금까지 미뤄 왔다. 그들은 생전에도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일체의 기념물 건립 제안을 거부했는데, 이야말로 나라에서 기념해야 할 인물들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토론에서 이명화 박사는 "일제는 신사를 종교로 위치시키고자 했지만 대중화하는 데 실패했고, 신도 전파의 가장 큰 걸림돌은 한국 기독교였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강력한 저항운동을 전개한 이들은 신사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실제로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사실을 간파했기에 핍박 속에서도 종교적 양심을 지키고자 순교도 불사했던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면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신앙의 문제인 동시에 명백한 민족운동으로 평가돼야 한다는 의견에 뜻을 같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