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1장 의식의 구조와 기능

칼 융(C. G. Jung)의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보이는 신체 외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심리 및 정신이라 부른다. 심리 및 정신은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바탕으로 분석심리학은 인격의 전체를 정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근래 와서 우리는 정신의 특성을 심리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여전히 심리는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차이일 뿐인데, 이는 심리학에서는 심리로 보는 반면, 의학은 정신으로 보는 시각인데 비해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하나의 전체라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정신은 물론 그 특성에 따라 다시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는 인간의 의식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하자.

1. 의식의 기초 이해

인간에게는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이는 부분을 신체라 한다면, 보이지 않는 부분을 심리 및 정신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보이는 신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돼, 불과 이삼십년 후에는 혈관으로 칩이 들어가 치료할 정도로 의학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분인 심리 및 정신의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기에 갈수록 심리 및 정신의 문제는 심각해져 가지만, 시원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것만 같. 이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인 심리 및 정신의 특성이 아직도 연구의 대상임을 의미한다.

신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도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에서 지금 의식이 되는 부분과 의식이 되지 않는 부분이 그것이다. 우리는 의식이 되는 부분을 의식(意識)이라 하고, 의식이 되지 않는 부분을 무의식(無意識), 또는 비의식(非意識)이라 한다.

1) 의식의 정의

의식(意識, das Bewusstsei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금 생각되거나 의식되는 그 자체인데, 지금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아는 것이 바로 의식이다. 이런 의식은 심리학에서는 자아와 관련되어 설명이 가능해지는데, '자아'는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아는 것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신은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과 함께 시작되고, 아는 것처럼 의식의 차안에 놓여 있는 이른바 무의식 정신으로까지 추구해 나아간다.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을 두고 우리는 정신의 경험을 의식의 작용, 또는 정신의 운동이라고 설명한다. 정신경험이란 의식이 작용하고 운동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앎에 도달하는 것이며, 의식에게 새로운 대상이 의식의 작용이나 운동으로부터 생겨나는 한에서는 의식 자신의 진행 속에 새로운 인식에로 전진하는 내면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의식이 대상을 향해 있으면서 그 자신이 변화는 동안에 이러한 법칙에 따르는 작용이 바로 의식이 자신에게 행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식은 무의식과 더불어 우리의 정신계를 이루고 있는 두 특성이자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의 두 축에 대하여 인간이 스스로 아는 것이 의식이라면, 인간이 모르는 모든 심리적 경향을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일정 부분 자아와 관계되지 않고 있지만 나중에는 관계될 수 있는 개인의 생각, 과거의 경험, 감추어진 욕구 등이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무의식이 바다와 같이 드넓은 것이라면, 의식은 그 반대로 극히 작은 섬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가장 고전적인 비유는 '빙산의 일각'으로 표현된다. 의식이 보이는 부분의 얼음덩어리라면, 무의식은 바다 속에 감추어진 어마어마한 얼음덩어리인 것이다. 이때 의식은 자아에 대한 심리 적 및 정신적 내용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그 기능은 대개 외부세계에 대한 방향감각과 지각에 관련되어 여러 가지 특징으로 정리되는 편이다.

2) 의식의 인식

의식의 인식은 자아인식 또는 자기의식과 관련된다. 인간이 나타난 현상과 그 내면의 표상에 관한 것을 안다는 것은 정신의 작용인 의식의 방식들, 즉 사념, 지각 그리고 오성(悟性)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기의식에 도달하지만, 자아인식 또는 자기의식은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물론 의식은 자기 자신을 알기 때문에, 의식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증명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탐색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이 어떤 특성을 가진 존재인가? 이에 대한 질문은 의식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식을 알 수 있으면, 의식이라고 인정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의식은 심리학에서는 대개 출생이전에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출생 이전 형성된 의식은 출생 후에 발달을 거듭하는 특성을 갖고 있기에 의식이 잘 발달되지 않은 유아기와 장성한 성년의 의식은 기능적으로 차이를 나타낸다.

그러면 이러한 의식은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칼 융은 이에 대하여 신체의 동체성(身體同體性, identity)을 지적한다. 인간에게 의식이 존재하는지를 인식하는 작용은 신체의 존재에 대한 지각(知覺)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이는 의식이 지각의 산물임을 의미하는데, 이는 대뇌의 외세포에서 비롯되는 피부감각기관의 작용에 정신적 특성이 가미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체의 존재 유무를 인식하는 문제는 일련의 의식기능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의식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기능이란 일차적으로는 단순한 기능인 기억을 말한다는 점에서다.

처음 유아기 시절에는 무의식 상태로 있던 것이 서서히 의식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자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우리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가 장난감과 주변의 다른 대상들과 구분하는 것을 본다. 아이는 장난감을 구분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융은 이러한 의식의 존재유무는 아이가 '나'라고 하는 몸을 의식하여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된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의식이란 신체의 동체성(identity)에서 부터 출발한다는 것이기에 실로 이는 '자아'의 인식이면서 지각이기에 자아의 인식은 그대로 의식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2. 의식의 생성과 발달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면서 발달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의식의 정체는 무엇이며 그 존재는 어떻게 변형되어 가는가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 질문과 관련하여 심리 및 정신의 부분에서 의식에 대한 개념을 알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의식의 생성과 발달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1) 의식의 생성

의식은 어떻게 생성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의식의 뿌리를 더듬고자 하는 의도이다. 의식은 융에 의하면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 의식이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의식의 생성과 산출을 의미한다. 의식은 무의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출발하려는 것인데, 이는 처음부터 의식과 무의식의 존재를 구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란 본래 무의식이던 것이 그 기능상 의식으로 전환되었다는 특성을 말하는 것과도 같다. 물론 의식은 반드시 무의식적이었던 것이 현재화되었다는 것만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의식은 감각적 확신이 구체적으로 사념(私念)되는 것이기에 그것의 추상적-보편적 수단으로써는 적중시킬 수 없는 것으로 '여기', '지금', 그리고 '이것'이라는 특성으로 지칭될 뿐이다.

이런 특성은 의식이 현재에 정신이 깨어있는 상태로서 지금 자아와 관련되고 있다는 시기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부득불 의식이란 현재의 일에 직면하여 생각하고 느끼고 아는 것에 제한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규정은 물론 의식의 현상학적인 측면임을 말해야 한다. 다만 의식이 무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의식의 작용이 무의식의 기반과 많이 관련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심리학의 발달로 인하여 의식과 무의식이 구별되어 의식이란 이제 무의식에 잠재하던 것이 수면으로 떠오른 특성으로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상의 논리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의식과 무의식의 엄격한 구별은 아직도 어려운 문제이다. 무의식이 의식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정신의 특성을 두부를 자르듯이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특성과도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의식이 무의식이 될 수 있으며, 무의식도 때에 따라서는 의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식이 항상 의식이 아니며, 무의식이 언제나 무의식으로 남아 있지만은 않는다.

더욱이 의식이 갖고 있는 기능을 무의식도 어느 정도 갖고 있기도 하다. 융은 무의식도 의식처럼 지각하며, 생각하며, 느끼고, 의욕하며, 기도(企圖)하면서 계속적으로 기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물론 융은 의식에 비해 무의식을 더 세분하여 의식의 바닥을 이루는 하의식(下意識, Unterbewusstsein)이라 부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존재기능적인 측면에서 무의식은 의식과 유사한 특성을 갖지만, 존재의 특성에서는 엄격하게 구분되고 있다. 융이 의식적 상태와 무의식적 상태 사이에 개연적(蓋然的) 의식(ein approximatives Bewusstsein)이라는 중간물을 가상할 수 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의식의 작용

의식은 정신에서 주체적 자아기능과 관련된다. 의식은 기능을 통해서 그 존재의 여부가 확인되는데, 이는 의식이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서 그 기능 작용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점에서다. 정신에서 의식의 작용이란 의식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정한 대상을 생각나게 만든다. 그것은 의식과 대상의 관계, 대상과 의식의 관계를 규정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는 점에서다. 대상은 그 어떤 특성을 갖든지 간에 현상적으로는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는 의식은 대상에 관계를 맺고 있지만 대상에 반드시 본질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상은 본질이기에 대상은 지각되건 말건 간에 그것에 대해서 무관하지만, 의식에서 지각작용은 운동으로서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비자립적인 것, 즉 비본질적인 것으로 특성화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의식에서는 인식하고 안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이때 감각적인 앎의 풍부함은 지각에 속하는 것이고, 의식으로 알 수 있는 직접적인 확신은 감각적인 앎의 다양함에서 하나의 부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식은 의식을 대표하는 자아기능과도 일치한다. 자아는 의식과 관련되어 있기에 의식은 자아로만 그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의식의 주체가 되는 자아는 우리의 오감이라는 감각을 통해서 뇌로 전달되어 사물을 식별하는 지각을 가능하게 만들고, 그 지각은 다시 의식을 통한 인식이 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지각은 감각적 확신이 성취하지 못한 일을 행하고, 의식은 지각이 식별한 것에 작용하여 뇌의 정보처리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청각, 시각 등의 감각적인 확신에서는 지각에 접수되어 뇌로 전달되고, 의식은 지각 작용으로서 생각하는 인간의 오성 작용이라는 사상에 도달한다.

지각은 사물을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오성은 독립성을 지양하여 지각에서 서로 갈라진 것을 하나로 보려는 동일한 본질로서 파악하는 특성이다. 지각에서는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것을 개별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보면, 생각하는 작용의 사상은 의식의 가장 고유한 요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융은 의식에 해당하는 중요한 4가지 기능을 '사고', '감정', '감각', '직관'에 주목한다. 의식의 작용이란 이 네 가지 기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 기능은 다시 의식에서 일련의 기억을 통해서 일어나는 정신기능의 분화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개별적인 분화의 발생을 통해서 이러한 의식의 기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신의 기능인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의 기능은 의식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인간의 정신생활이나 활동을 위해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인식하는 주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다.

의식은 전술한 4가지 기능 외에도 의식의 지향을 결정하는 두 가지 태도를 갖고 있다. 내향성과 외향성이 그것이다. 외향성이란 의식이 외부세계로 향하는 정신적 특성이다. 그 반면에 의식이 자기내부의 세계로 향하는 것을 내향성이라고 한다. 개인의 정신에너지는 이렇게 외부로 또는 내부로 흐르는 특성을 갖는다. 정신에너지가 외부로 향하여 흐르면 넓이를 추구하며 주변의 상황을 고려하는 객관성을 지니게 된다. 그 반면에 정신에너지가 내부로 흐르게 되면 깊이를 추구하며 주관성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 의식은 개체가 물론 자기의 대상에 대해서 사유하면서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느끼면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의식은 정신의 구체적인 작용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생각하는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곁을 지나갈 뿐이고, 뭔가를 바라는 기도(祈禱)인 것이다. 의식의 사유 자체는 무형의 종소리의 울림이거나 따뜻한 안개를 가득하게 채우는 일, 또는 유일한 내재적인 객관적 방식일 수 있는 개념에는 이르지 못하는 사유인 것이다.  

이 무한한 수순인 내면적 느낌도 분명히 그 대상을 갖지만, 이 대상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대상으로서가 아니기 때문에 이 대상은 어떤 낯선 것으로서 등장한다. 의식이 다만 기도(祈禱)로서 머무는 한에서는 의식은 자기의 본질과 동류이지만, 의식의 경향은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이럴 때 의식의 고유한 무능력은 자신과 싸우고, 금욕하여, 고행함으로써 자신을 부정하는 태도는 잘 알지 못하는 특성으로 의심을 품은 채 자기 자신을 관망만 하는 것으로 될 수 있다.

그 결과 의식은 자신과 조그마한 행위에 한정된, 그리고 고심하면서 사유하는 초라한 만큼 불행한 것으로서 일종의 위축된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의 외향성과 내향성은 의식의 주체인 자아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작용으로서 이루어진다. 이런 의식의 기능은 융의 성격유형론의 요체이기도 하다.

3) 의식의 발달

의식의 발달은 인격에서 정신의 분화와 관련된다. 정신의 분화는 구체적이고 미세한 발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종국에는 전체적인 인격성장을 의미하는데, 개인의 정신은 미분화에서 분화되는 과정을 거쳐 인격화되기 때문이다. 정신의 분화에서는 우선적으로는 자신으로부터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의식이 타인으로부터 분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개성화는 심리적 발달에서 최고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의식이 발달되어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면 단계적 진행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를 테면, 의식은 이 단계적 진행에서 어떤 확신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의식은 비록 근원적으로는 전혀 다른 감각적 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변화에 있어서 전진하면서 의식 자신이 '일체의 실재성'이라는 어떤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발달의 과정을 통하여 의식은 확신된 어떤 특성을 갖기에, 이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자아의 정립과도 거리가 멀고, 선험적 연역의 결과도 아니며, 의식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대상의 현상 방식에 있어서 발견하고 지적한 어떤 것일 수 있다.

이런 것은 정신현상으로 설명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제 의식은 자기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시작하는 그 점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관철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 이르면 의식은 그 자신이 모든 실재성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도 있다. 이로써 의식은 뭔가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경험이 앎으로 고양된다면, 사념이나 지각, 그리고 오성의 운동에서 자신의 실재성이 입증되기도 한다. 이런 발달의 과정이 바로 의식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융은 인간의 정신이 충분히 분화되어 균형이 잡히고, 통일된 인격으로 된 상태를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부른다. 이런 경우의 개성화는 별개의 분할이 불가능한 통일체 또는 전일성(全一性)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성화는 일생동안 이루어지는 것으로 발달된 자아가 되는 것이 그 목표인데, 미발달된 자아가 의식화 되는 것이 진정한 개성화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물론 분석심리학에서 개성화의 목표는 의식의 발달과 그 수준을 같이 하면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즉 본래의 자기 자신을 아는 일종의 '자기실현'이기에 결정적인 요소는 항상 의식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개인의 정신에서 의식은 때로 인격의 주체가 되는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의식은 개성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도 하다. 의식이 높아지면 인식력도 높아져 무의식의 특성이 그것과 조화롭게 작용하면서 개인의 특성이 드러나는 개성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다. 이를 우리는 다른 말로 '의식의 확대'라 부를 수 있는데, 의식의 확대는 의식기능을 활발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에게 의식의 기능을 활발하게 하려는 노력이 바로 성숙된 인간으로 승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의식의 확대는 곧 인간이 지향하는 특성이면서 융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던 개성화의 목표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의식의 확대는 자아의 존재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다. 융 심리학의 정신치료에서 개성화에 자아의식의 확대를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의식은 보이는 신체와는 다른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다루어졌다. 이런 의식이 다시 잘 알 수 없는 의식의 차안인 무의식과도 비교되어 기술되기도 했다. 인간의 생명을 이루는 신체와 마음이 의식이라는 영역에서 다시 기술되는 것은 어쩌면 매우 추상적인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인간이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하나의 생명체라면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생명체는 언제나 이런 두 결합, 이는 때로는 느슨한 결합이기도 하고 매우 끈끈한 결합이기도 하지만, 이 결합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렵기도 하고, 이를 이해하면 너무나 단순하고도 쉬운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심리학은 인간의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신체 외의 정신적 작용 때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나아가 인간의 본질을 밝히려고 노력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 인간에 대한 플라톤의 관심이 영혼에 집중되고, 그의 철학적 인간학이 본질적으로 심리학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3. 요약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의 구조와 기능에 대하여 기술했다. 칼 융(C. G. Jung)의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보이는 신체 외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심리 및 정신이라 부른다고 했다. 심리 및 정신은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바탕으로 분석심리학은 인격의 전체를 정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었다.

근래 와서 우리는 정신의 특성을 심리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심리는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차이일 뿐인데, 이는 심리학에서는 심리로 보는 반면에, 의학은 정신으로 보는 시각인데 비해서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하나의 전체라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에서였다. 이 정신은 물론 그 특성에 따라 다시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는 인간의 의식에 대하여 고찰해 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