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전 6권)>

판타지 영화를 보면 CG(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놀라게 됩니다. 저는 약간 다른 시선에 놀란 영화가 <해리포터> 시리즈였습니다. 책으로 먼저 읽고, 영화를 봤는데 제가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화면이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하다 못해 가상의 스포츠인 '퀴디치 경기'마저 책에서 나온 경기장에서 경기 규칙, 선수들의 모습까지 너무 똑같았습니다. 그건 책 속에서 표현을 세밀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의 기술이 그만큼 발전했다는 뜻도 될 겁니다.

이제 소설과 영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판타지 소설은 더욱 친밀감이 높아졌습니다. 이번 책 <반지의 제왕>이 완간된 건 1955년, 영화화된 건 2001년(1부). 46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책 속의 모습을 화면으로 구현하는데 오래 걸렸다는 건 책 속의 장면과 이야기가 잘 그려지지 않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걸 말합니다. 이건 좀 더 깊게 들어가자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영화를 봐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영화를 보는 게 낫다고 봅니다.

참고로, 제가 읽은 책은 지금은 품절된 6권짜리 구판으로, 개정판은 7권짜리와 3권짜리로 나왔습니다. 이 책은 카피부터 호기심과 함께 기를 죽이게 합니다. '20세기 영미문학의 10대 걸작'. 이 문구에 속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걸작이긴 걸작인데 '영미문학'에서만 입니다. 우리가 읽을 책은 '영미문학'을 한국말로 번역한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기에 '걸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곁길로 가는 것 같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노벨상 중에서 없어져야 할 분야가 '노벨문학상'이라고 봅니다. 각 나라마다 언어에 따른 뉘앙스와 의미가 다른데, 한 가지 잣대로 문학성을 평가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들 중 어떤 책은 '이게 왜 상받았지?' 의심이 가고, '내가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게 하기도 합니다.

영미문학 쪽에서 이 책은 걸작일지 모르나, 저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은 '어려운 판타지 소설'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를 미리 보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고, 그림도 안 그려지며, 진행방식도 아주 느리고, 구성도 너무 구식입니다.

반지의 제왕
▲영화 <반지의 제왕> 중 한 장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도대체 반지가 뭐기에 이렇게 판타지 세계가 긴장하는지 오래 설명을 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지의 기능은 기껏 투명인간으로 만든다는 것 외에 특별한 기능이 없어 보입니다. 또한 반지원정대가 우연한 계기로 세 팀으로 나뉘어 이동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세 팀이 이동거리를 짧게 하여 한 팀이 조금 가면, 다른 팀에서 전의 팀이 갔던 시간에 어떻게 이동했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주는데 반해, 책에서는 이동거리를 아주 길게 잡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책 한 권을 한 팀에만 할애합니다. 그래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영화를 미리 봤을 때에만 이해가 됩니다.

번역에 있어서도 아쉬움이 큰 건 (제가 읽은 버전의 책에 한해) 이동거리의 단위를 'km'가 아니라, '리(里)'로 표기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이 책이 고전이라 해도 그렇지, 원서에서는 마일(mile)로 했을 것 같은 거리 단위를 우리나라의 옛 거리 단위로 표기한 건 실소가 나올 지경입니다. 우리나라 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리고 책은 영화에서만큼 긴박감이 넘친다거나, 역동적이지도 않고, 중요 인물인 '골룸'도 그렇게 징그럽거나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만 쓰자니 이 책은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반지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반지의 영향력을 무서워한 나머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과정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그런 반지의 실제적 기능은 위에서도 언급했듯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 절대 반지를 끼면 사라집니다. 투명인간이 되는 겁니다. 거인이 된다거나,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거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거나, 하늘을 날 수 있다거나,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등의 놀라운 초능력이 아니라, 그냥 사라지게 하는 게 다입니다. 어차피 다 가짜인데 좀 무서운 괴력을 부여하면 될 것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게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나)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무서움을 봤습니다. '타인에게 나는 보이지 않지만 나는 타인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 가장 무섭습니다.

반지의 제왕
▲영화 <반지의 제왕> 중 한 장면.
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타인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함'을 넘어 실제 모습에서 쾌락을 느끼게 되고, 이 능력의 피해자는 어느 곳도 안전지대는 없어 매사 조심하게 됩니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CCTV, 블랙박스, 녹음기, 관찰 카메라, 언론, 인터넷 등이 일종의 '투명인간의 변주'라 할 수 있습니다.

비밀을 알고 싶고(사용자), 비밀을 갖고 싶은 이중적이면서 관음증적인 모습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건 사고들이 '투명인간의 기능'에서 나옵니다. 은밀히 진행하여 숨기고 싶은 일들이 '투명인간의 기능'을 통해 발각되어 온 나라, 전 세계가 난리가 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을 보자면 가장 현실적으로 무서운 판타지의 초능력은 '(나는) 보이지 않되 (타인은) 보이는 능력'입니다.

또 하나 이 책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3부에서 주인공 아라곤이 병사들을 모으기 위해 '사자의 길'에 가서, 전에 이실두르와의 약속을 어겨 죽었던 병사들을 모아(결국 유령이죠) 미나스 티리스에 가서 적들을 소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이 '사자의 길'의 '사자'를 죽은 자를 뜻하는 '사자(死者)'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김리'라는 용사가 그때의 일을 회고할 때 '사자'를 동물 '사자'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책에서는 한자를 쓰지 않아 혼동이 된 겁니다.

동물 사자라 한다면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전(前) 도서인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사자가 예수님으로 나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사자의 길'을 통과해서 많은 병사들을 모았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건,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사자(死者)', 즉 내가 죽어야 사자(獅子), 즉 예수님이 되어 승리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었다 다시 사시고 이 세상을 이기신 분입니다.

반지의 제왕
▲영화 <반지의 제왕> 중 한 장면. 사우론의 군대는 인간 종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곤도르 왕국의 수도인 '미나스 티리스'를 공격한다.
반대로 접근해서 설명하자면, 내가 세상을 이기려면, 사자(獅子, 예수님)가 되려면 사자(死者)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어야 살고, 죽어야 이기는 것이 기독교가 이 세상에 전파되는 원리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말한대로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에 같이 휩쓸리는 이유는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헌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손해보려 하지 않고, 하나라도 더 가지려 하고,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는커녕 그만한 대가를 받고 가려고 하고, 왼뺨을 맞으면 바로 신고하여 전과자를 만들려 하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습니다. 죽지 않으니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죽지 않으니 믿는 자나 교회가 욕을 먹는 겁니다. 죽지 않으니 세상이 더 악해지는 겁니다. 죽지 않으니 승리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린 사자(死者)가 되어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손해봐야 합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그를 높여주고 나는 낮아져야 합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줘야 합니다. 그러면 이깁니다. 죽으면 내가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이 세계가 삽니다. 죽으면 승리합니다. 우린 '사자(獅子, 예수님)의 길'로 가기 위해 사자(死者,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건 작가인 톨킨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겁니다. 한자를 몰랐을테니 말입니다(^^). 또한, 번역자가 한자를 같이 표기하거나, 영어 단어를 덧붙이지 않아서 제가 묵상을 통해 얻어낸 것이지만, 그래서 더 깊이있고 의미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중반까지 읽을 때는 '기독교 소설'이라 하기 어려워, 감상평을 쓰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는 이만큼 은혜스러운 기독교 소설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건, 하나님은 우리 삶 곳곳에 자신을 숨겨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면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숨어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모습을 발견할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천지를 창조하신 분께서 교회에만, 기독교 단체에만 십자가 푯대가 있는 곳에만 계시진 않겠지요. 어느 시간 어느 곳에서, 어느 책 어느 공연 어느 광장 어느 가게에서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번 책을 읽으며 그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소설'이라는 책에서만 주님의 내용이 있는 건 아님을 알게 되어, 저의 소설 읽기의 폭이 더 넓어졌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책을 읽으며 그걸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성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