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는 없다
샘 해리스는 스탠포드에서 철학을(그 이전에는 약물과 여러 종교들에 대한 것도 관심을 가졌다) 공부했고, UCLA에서 인지신경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논문 제목이 '도덕의 배경: 과학은 어떻게 인간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가(The moral landscape: How science could determine human values)'였다. 신앙과 불신앙 간의 신경의 기저에 대한 연구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샘 해리스는 그의 책 <신앙의 종말 The end of faith)>로 리처드 도킨스, 다니엘 데닛,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더불어 신무신론 혹은 전투적 무신론의 반열에 올랐다. 본서의 원제는 단순히 'Free Will' 즉, 단순히 '자유의지'이지만, 국내 출판사는 보다 더 도발적으로 '자유의지는 없다'로 내놓았다. 이 책은 매우 얇은 소책자로서 원서, 번역서 모두 100쪽이 되지 않는다.

책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란 도덕적·법률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흉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의 사정(트라우마나 뇌종양 문제 등)을 알게 되면 판단을 주저하게 된다. 의지와 사고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배경으로부터 발생한다. "자유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는 과거에 했던 것과 다르게 행동할 수도 없으며, 자신의 사고와 의식의 원천이 자기 자신이라는 주장도 틀렸다.

뇌는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우리는 그 일부만을 인식할 수 있다. 리벳의 실험은 인간이 무엇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기 전, 이미 그에 앞서(약 700밀리세컨드) 그러한 선택을 할 것이라 반응하는 뇌의 부위 두 곳을 발견했다(80%의 확률). 이 외의 실험들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기 전 이미 무엇을 선택할지 촬영장치(fMRI)를 통해 관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뇌는 물질이다. 물질은 자연법칙을 따른다. 비록 자발적 행동과 비자발적 행동 간에 차이가 있을 지라도, '의도'그 자체, 그리고 그 의도에 따른 선택들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주제에 접근하는 철학적 방식은 다음 세 가지이다. 결정론, 자유론, 양립가능론. 자유론은 비물리적 영혼을 주장하고, 결정론은 오로지 배경 원인에만 의존한다고 주장하며, 양립가능론은 이 양 극단을 피하려 한다. 양립가능론은 결정론이 소시오패스도 희생자처럼 보이게 만들어 도덕적·법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정작 양립가능론은 결정 이면에 놓인 욕망을 해결하지 못한다. 다니엘 데닛과 같은 양립가능론자들은 심리학적 사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자신이 자기 사고의 행동의 주인이라고 느끼는 주체성에 대한 감정과 책임감은 관계없다. 전자의 감정은 허상일 뿐이다.

물리적 관점에서 모든 것은 비인격적 사건으로 환원 가능하기에, 일부 과학자와 철학자는 우연 혹은 양자불확정성이 자유의지에 대한 숨통을 틔어주길 기대한다. 그 대표적인 생물학자가 마르틴 하이젠베르크(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한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가 아니다-서평가 주)이다. 마르틴 하이젠베르크는 뇌의 특정 작용은 무작위적으로, 자기발생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자유의지'와 상관없으며, 오히려 '나 자신'을 놀라게 할 사건이 될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불확정성에 우리의 행동이 종속된다면, 책임감은 더욱 사라진다.

우리의 선택은 사건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결정론은 운명론과 다르다. 운명론의 태도,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비관적 태도도 일종의 선택이다. 더욱이 '충동'은 큰 힘을 갖고 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욱 적극적 선택이 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존재하기에 책임을 진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한계는 생물학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르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착각이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당신의 욕망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이러한 진실에 마주한다 해서 비생산적인 태도를 지녀선 안 된다. 도리어 과거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나의 문제점을 보다 현실적으로(생물학적으로, 밥 한끼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책임을 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신적 인과관계의 형이상학이 아니다. 인간 전체의 성격 혹은 전반적인 성질들(믿음, 욕망, 목표, 편견 등)을 살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살해할 의도를 지녔는지, 그리고 그것을 실행 했는 지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도덕성에 '운'이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야 말로 비도덕적이다.

도덕에 대한 관점이 변해야 한다. 이것은 종교적 형이상학으로부터의 진보이다. 종교는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가혹한 처벌을 정당화했다. 물론 여전히 "처벌하는 논리는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재채기를 불법화할 수 없듯, 유전자, 시냅스 전위 등을 고려하지 않는 처벌은 잘못이다. "나는 당신이 도저히 통제하지 못할 행동에 대해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자수성가 등의 개인주의는 환상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수많은 운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근면과 게으름마저 신경학적인 상태이다. 우리는 부단히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자유의지가 환상이기에, 우리는 사회를 개선하는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며, 동시에 개인의 책임을 그 한계를 고려하여 적절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본서는 그 어떤 자유의지 논쟁에 관한 책들보다 가장 단정적이다. 물론 그가 이런 주장을 근거없이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짧은 책의 첫 각주는 관련 실험에 대하여 나열하며 전문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첫 각주가 아닐까 할 정도이다.

샘 해리스의 논증 중 가장 오해될 만한 부분은 자유라는 단어와 선택이라는 단어 간의 혼동일 것 같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과 선택이 없다는 말은 다르다. 오히려 우리는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순식간에 떠올릴 수 있는 단어에는 '내가 아는 단어'라는 한계가 있다. 나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나의 선택은 외부자극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내가 지닌 한계에 기인한다.

샘 해리스의 논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람은 아마도 신경과학자나 심리학자 정도일 것이다.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의문이 있다. 모든 생물에게는 '성장'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선택의 폭을 넓혀줄 것인가? 교육을 통해서든, 아니면 수술을 통해서든, 우리 활동의 선택의 폭을 넓혀줄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갇힌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 그 진실을 통해 알고자 하는 바는, 조금은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샘 해리스가 종교에 비호의적이기에 오해할 만한 부분이 있어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기독교는 자유의지를 통해 영원한 처벌이라는 개념을 정당화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지만, 동시에 모든 존재가 연대적 책임을 진다는 샘 해리스 자신의 도덕적 주장과 유사한 원죄 개념이 있으며, 자유의지는 기독교의 예정론·구원론과 더불어 존재한 것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다.

물론 샘 해리스의 입장을 기독교가 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해석에 또 다른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규선(서평가,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