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27장 노년기의 건강한 삶의 방법(3)

노인기의 건강한 삶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기에 여유를 갖기 어려운 노인기에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것이 노인들이 건강한 삶을 희구하는 요인이다. 이런 노인기의 건강한 삶에 대해 다양한 의학적인 처치와 처방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건강에 대한 모델로서의 치료적 의미를 담고 있는 방안을 제시하겠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의미치료의 방법을 접목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1. 역설적 의도를 통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해소

우리의 인생과 삶이란 언제나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 가운데 '나의 삶이 죽음의 한 가운데 놓여져 있는 현실'보다 더 한 고통이 있을까?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집중되어진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노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신 치료자인 어빈 앨롬은 암으로 죽어 가는 환자들을 오랫동안 보살핀 적이 있었다. 그는 "거듭해서 지켜볼 수 있었던 사실은 삶의 깊은 의미를 소중하게 지키고 있는 환자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한 환자들보다 훨씬 오래 건강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살아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삶의 깊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환자들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자신의 상황에 두려움을 갖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열망하고 결정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다.

1) 역설지향을 통한 불안의 해소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니체의 말은 의미치료의 임상방법의 한 가지인 역설지향(Paradoxical Intention)이 된다. 역설지향이라는 개념은 공포가 우려하던 결과를 낳고 과잉의 도가 오히려 목적 달성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양면적 현실에 착안한 기법이다. 이런 역설지향은 증상의 악순환 고리가 발생하는 것을 처음부터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인지적 치료기술이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것과 반대되는 방법을 사용하면 결국에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멋진 이성 앞에서 바보같이 떨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는 노인을 예를 들어 보자. "그러면 안 된다.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해"라고 되뇌이면 되뇌일수록 불안은 오히려 커질 뿐이다.

이러한 증상은 예기불안(anticipatory anxiety)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기불안의 특징은 노인이 우려하는 바로 그 증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다. 확실히 공포증은 부분적으로 불안이 일어나는 상황을 회피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발생하는 반면에, 공포증의 발병은 노인이 공포를 갖기 시작한 상황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노인이 죽음이라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죽음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있을까 몰두하면 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가중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지향은 거꾸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왕 떨 것, 얼굴 빨개진 모습으로 얼마나 심각하게 떨 수 있는지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더욱 열심히 떨어보자는 것이다. 멍석을 깔아놓으면 하던 짓도 못하는 법이다. 그것은 "이제 고치는 걸 포기해야겠어"라고 외치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는 점에서다. 다가오는 발표 때문에 불안하다면 사람들 앞에서 더 떨고 당황하고 더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회피하지도 말고 의도적으로 하려고 할수록, 내 마음이 두려워하는 일은 오히려 점점 더 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에서다.

이때 누구든지 불안을 피하고 싶다면 불안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맞서야 하며, 호랑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옛 선인들의 지혜와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이 두려워 회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더 커진다. 죽음이 두렵지만 빨리 죽음을 맞이하자는 역설지향을 하게 될 때 오히려 현재의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창조적 생각들을 갖게 된다.

2) 역설지향을 통한 불안신경증의 해소

신경쇠약증과 불안 신경증은 그 병인과 메커니즘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불안 신경증은 흔히 신경 쇠약증, 혹은 다른 신경증과 함께 나타나거나 그 증상들이 서로 교체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다. 신경 쇠약증의 영역에서 불안 신경증이나 다른 각 신경증들의 병인과 메카니즘을 분리해 낸다면, 신경 쇠약증과 유사 신경 쇠약증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신경 쇠약의 증상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울증의 범주에 들어야 할 것들이 신경 쇠약증에 포함된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노인의 불안신경증은 역설지향의 방법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안장애에는 18가지의 증상이 드러난다. 1) 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몸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는다. 2) 화가 나면 근육에 긴장이 오고 때로는 통증을 느낀다. 3) 몸을 어찌할 바를 모른다. 4) 피로를 싑게 느낀다. 5) 숨이 가빠지고 목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6)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낀다. 7) 손에 차가운 땀이 나면서 끈적끈적 해진다.8) 입이 마른다. 9) 어지럽증을 느낀다. 10) 매스껍고 설사가 나면서 배에 통증이 몰려온다. 11) 몸이확 뜨거워지거나 갑자기 차가워진다. 12) 화장실에 끊임없이 간다. 13) 목에 뭔가 걸린 것같아서 음식물을 삼키기 힘들어진다. 14) 무언가 머리를 조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며 몸시 초초해진다. 15) 조그만 일에도 매우 놀란다. 16) 집중이 잘 안된다. 17) 불면증이 온다. 18) 아무것도 아닌 일로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낸다.

불안을 이기려고 하면, 더 불안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때 오히려 역설지향, 즉 반대로 하기를 시도하면 불안이 해소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역설지향은 불안노이로제(Angstneurose)나 강박노이로제(Zwangs- neurose)의 순환적 메커니즘을 제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방법은 부끄러움과 관계된 불안-광장불안, 거리불안, 적면불안, 틱(Tics), 말하는 불안, 과도한 땀, 폐소공포증, 동물 불안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역설적 의도를 통해 자기 거리감의 능력을 강화시켜 불안이나 강박증 같은 비합리적 부정적 관념이 중성화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역설적 의도 방법을 통한 거리두기를 사용할 때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강박증 같은 부정적 관념에서 탈피할 수 있다. 의미치료의 역설지향이라는 기법이 먹혀 들어가는 것도 이런 거리 두기 능력이 노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고든 알포트(Gordon W. Allport)는 《개인과 종교(The Individual and His Religion)》라는 책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웃을 줄 아는 노이로제 환자는 스스로를 다스리는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절반은 치유된 셈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가 유머(Humor)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유머가 전혀 없는 신경증 환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유머스럽게 인식함으로써 이러한 증세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다.

3) 역설지향을 통한 공포증의 해소

공포증은 불안 때문에 생기는 병의 일종으로 주로 경험에 의한 감정반응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최초의 위험한 상황의 공포감이 잠재되었다가 다른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 일어난다. 정신의학자들은 공포증을 불안장애의 한 형태로 분류했으며, 공포감을 일으키는 대상에 따라 공포증 앞에 수식어를 붙여 공포의 본질을 수백 개의 단어로 나타냈다. 이 병이 있는 사람들의 주된 증상은 불안이며, 공포증은 불안 때문에 생기는 병의 일종으로 주로 경험에 의해 얻어진 감정반응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처음의 위험한 상황에서 야기된 공포감이 억제되어 있거나 잠재된 상태로 있다가 다른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 일어난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을 한 사람은 물에 대해 비이성적으로 지나친 공포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은 앞으로 그런 상황을 피하려 애쓸 것이며, 이러한 반응은 짧은 기간 동안에는 불안을 줄여 줄 수 있으나 그 상황에 대한 연상작용이 강화될수록 불안이 증가한다. 공포증의 해소와 관련하여 전술한 유머의 한 예를 들어 보자.

한 젊은 내과 의사가 심한 발한공포증으로 병원을 찾아왔다. 그는 오래 동안 자율신경계의 장해로 고생해 왔다.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자기 상사를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을 때 땀을 흘릴 것을 예기했다. 그리고 이 예기불안은 심한 발한을 촉진시켰다. 실로 그것은 악순환이었는데, 발한과다가 발한공포증을 유발시키고, 다음에는 발한공포증이 발한과다를 일으켰다. 치료자는 환자에게 예기불안이 다시 생길 경우에는 일부러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는지를 보여줄 것을 결심하도록 권했다.

일주일 후에 그가 다시 찾아와서, 그는 예기불안을 야기하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아직 한 리터밖에 땀을 흘리지 않았으니, 적어도 10리터의 땀을 흘려야지"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고 보고했다. 이 역설적 결의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4년간 공포증으로 고생한 그는 단 1회의 면접 후, 이 새로운 절차에 의해서 자신을 공포에서 해방할 수 있었다.

이런 원리를 노인에게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다. 그러면 노인은 자아이탈의 특성 덕분에 자신에 대해 농담하고 웃을 수 있으며, 공포심을 비웃을 수 있다. 자아 초월이란 노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잊을 수 있고, 자신에 헌신할 수 있으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다. 이런 점에서 역설지향은 노인이 공포적 상황을 회피함으로써 그 두려운 결과들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데 대해서 신중해질 것을 요구함으로써 노인 자신의 공포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노출시킬 수 있다. 이런 것은 실제로 혼자 걸어가면 실신할 것 같다는 광장 공포증 환자에게는 그렇게 해보라고, 그래서 혼절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환자는 그럴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공포적인 상황과 직면할 수 있게 된다.

2. 역설지향을 통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해소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노인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죽음의 공포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버리는 방법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더 적극적으로 희망을 생각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중에 희망을 뜻하는 '세베르'라는 단어가 있다. 동사 ‘사바브’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2번 사용되었다(시편 119:116, 시편 146:5). 이 단어는 희망이라는 뜻 외에도 '조사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희망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1)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인식

인간에게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문제로 드러난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는데, 이는 인간에게서 가장 어리석고 이상한 점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기정사실화된 죽음을 맞이하면서 허둥대고, 망연자실하며, 뜻밖이라는 듯이 한이 맺히면서 가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신념에 따라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천태만상입니다. 죽음은 갑작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인간의 진화의 정도와 품위는 그 인간의 죽음의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의 정도에 따라 단순한 명(命)또는 사명이나 소명, 역할을 부여받아 학교인 지구에 나온다. 즉 태어나면서 공부할 양과 역할에 따라 수명을 부여받고 나는 것뿐 아니라 정해진 기간 안에 자신이 해야 할 공부나 경험을 쌓아야 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뒤죽박죽 살다가 허둥지둥 가게 된다. 삶은 영생을 위한 준비기간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꽃이 지면 열매가 남듯이 삶은 꽃이고, 죽음은 씨앗으로 남아 하늘 어딘가에 보관되는 것이다. 보관되는 곳은 삶 동안의 결과를 보아 정해진다. 진화의 수준이 높을수록 높고 좋은 곳에 보관 될 뿐 아니라, 이번에는 생명이 아닌 명(命)이 부여된다.

알베르 까뮈의 '행복한 죽음'이라는 책이 있다. 정말이지 '행복한 죽음'이 있을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행복한 죽음이란 언제 죽음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 혹은 물질적인 삶을 추구하기 보다는 내면적인 삶에 충실하기 등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종교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누구나 잘 살길 원하는데 한편으로는 잘 살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면 죽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런 것은 모두 죽음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때로 우울해지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지만, 예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란 바로 이런 우울한 상황을 인식하고 미리 예측하며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가까운 사람이 운명을 거두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평화로운 죽음으로 인해 '죽음이 그리 두렵지 만은 않다는 것과 할일을 마치고 가는 자의 얼굴이 온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유산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행복한 죽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행복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된다.

2) 희망을 통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해소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이런 죽음의 두려움에서는 무(無)에 대한 공포가 올라온다. 만약 내가 내 자신으로 믿고 신뢰해온 것을 굴복하면 어쩌면 우리는 무가 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최후의 두려움이야 각자 마주하겠지만 마음을 포함한 감각작용이 결여된 상태이다. 감각작용의 주기능은 두려움을 통해 방어하고 즐거움을 통해 추구하는 동물생존 나침반이다. 이는 감각작용을 가지면 죽게 되는 것을 감지할 때 두려워하고, 살게 되는 것을 감지할 때 즐거워하게 되는데, 이는 감각작용이 하는 일이다. 이 감각작용이 결여되는 것이 바로 죽음 또는 무가 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감각작용이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과 무는 감각에게 있어 <가지면 죽는 것>으로 감지되어 '두려움'이라는 신호가 나타난다는 점에서다.

이런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야'라고 외치는 것은 거짓희망 중 하나로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그 반면에 참된 희망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가운데 생긴다.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위협과 두려움을 고려하여 그 가운데서도 최선의 길을 선택해가는 과정이 참된 희망이다. 죽음의 공포가운데 역설지향의 생각으로 희망을 가지는 것은 현실의 상황을 고려하여 만드는 참된 희망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자살한 사람의 유서에서 종종 희망이 없다는 말이 자주 발견하게 된다. 이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비극이지만,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한 노인은 삶의 의욕을 가질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리그만(M. Seligman) 박사는 3가지 삶을 이야기 했다.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삶, 숭고한 삶이 그것이다. 행복한 삶은 만족한 삶을 말하는 것이고, 의미 있는 삶은 행복한 삶에 자신을 바쳐 자신의 존재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인가에 봉사하는 삶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숭고한 삶은 '목적이 있는 삶'을 말하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을 자기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였다.

희망은 인생에 목적과 의미가 있을 때 생각나는 생명 에너지이다. 또한 웃음은 답답하고 어두운 마음에 신선한 자극을 일으켜 긍정적인 기분을 만들어 준다. 순간순간 유머로 자아내는 통쾌한 웃음은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하여 희망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렇듯 역설지향으로 참된 희망을 발견하는 밑바탕에는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확신, 그리고 유머로 만들어 내는 통쾌한 웃음이 있다.

이처럼 역설지향은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노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불안신경증과 강박신경증에 큰 효과를 가져다준다. 게다가 효과가 금방 나타나지만, 역설지향은 만병통치약은 결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인생에서 사명감을 찾는 쪽으로 노인의 의식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투사의 제거는 애당초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결국 자기 연민에 빠져 있든 자기 멸시에 빠져 있든 간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치료의 실마리는 자기 초월에 있기 때문이다.

3) 신앙을 통한 죽음의 해소

죽음의 두려움을 해소하는 데는 아마도 종교의 힘이 가장 일차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종교는 신앙을 통하여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해소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에서다. 실제로 종교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점 때문에 존재하고 활성화된다고 보는 점에서 아무로 이론(異論)을 달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의 어거스틴의 경우를 들러 이를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18항이 언급하듯, 인간은 꺼져가는 육체의 쇠약과 고통에 괴로워할 뿐 아니라 영원한 소멸의 공포에 더더욱 괴로워한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이 갖는 두려움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통하여 예수께 돌아가고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이라 믿지만, 죽음의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분명 인간에게 있어 사멸성은 피할 수 없는 슬픈 상황이고, 삶에 대한 애착으로 표현되는 죽음의 공포 역시 자연적인 것이다.

여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사멸성이란 조건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게끔 하기에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성인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 마음의 심연에 새겨져 있다는 보편성을 제시하면서, 인간이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느님의 지혜를 소유하여 참된 현인, 즉 하느님에 따라 살고 하느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례성사로 시작하여 의로움의 완성에로 향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이중적 차원의 그리스도인 삶의 모습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이미 세례성사를 통해 은총 안에 살기 시작했지만, 곧 죽음에서 생명에로 넘어갔지만 아직 완전한 자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의로운 분이며, 그리스도인은 아직 죄에서 온전한 의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연약함의 표현인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순교자들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이들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전투를 통해서이다. 하느님은 신앙의 투쟁에 그리스도인을 놓으시어 정의의 전투에서 진보하는 이들을 가르치고 단련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전투는 참된 경건심으로 표현된다. 그렇기에 순교자들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향주삼덕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께 대한 참다운 예배인 경건심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이 순교자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는 권고와 위로가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하면서 겸손을 가르치는 수업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공포를 지닐 때 그리스도께 자신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고통스러운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정리: 노인기의 건강한 삶을 위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노인기의 건강한 삶을 위한 방법에 대하여 기술했다. 노인기의 건강한 삶은 노인이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기에 여유를 갖기 어려운 노년기에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의 문제는 노인기의 건강한 삶을 희구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인기의 건강한 삶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학적인 처치와 처방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건강에 대한 모델로서의 치료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그에 따른 대안적인 방법을 추구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의미치료의 방법을 접목하여 제시하고자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