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칭의론인가, 새 관점 칭의론인가?

입력 : 2016.12.01 18:12

[최덕성 칼럼] 칭의론 학술회(12월 12일) 취지문

비텐베르크
▲‘이신칭의’를 외치며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가 매 주일 설교하던 비텐베르크 타운교회 예배당. ⓒ리포르만다 제공
한국 기독교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여러가지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원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행사들을 개최하고 있다. 종교개혁 운동은 교회론 개혁인 동시에, 구원론-칭의론 개혁이었다. 후자는 당시 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고 개인의 선행과 공로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고 하는 등, 바울이 제시한 기독교 신앙의 요체인 이신칭의에 상충되므로 이를 개혁하려 한 운동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고 하면서 반(反)종교개혁 칭의론을 선전 확산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기독교 단체도 있다. 이신칭의 교리를 조롱하는 프로테스탄트들도 있다. 이 모순된 움직임의 중심에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 칭의론과 새 관점 학파의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를 수용한 김세윤 박사(풀러신학교, 신약신학 교수)의 칭의론이 자리잡고 있다.

김세윤은 유보적 칭의론, 곧 행위심판론을 주창하면서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 구원의 확신 불가성을 강조한다. 칭의와 성화를 동의어로 여기면서 종말의 날, 심판대에서 행위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고 한다. 칭의가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완성'된다고 한다. 물세례가 칭의의 수단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론을 맞줄임(約分)하면, 인간은 자기 행위에 따라 구원을 얻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개혁신학 관점에서 보면, 새 관점 칭의론, 김세윤 칭의론은 '다른 복음'이다. 기독교 구원 체계를 위태롭게 한다. 복음전도를 어렵게 한다. 성경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다. 반(半)펠라기우스주의, 로마가톨릭교회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역행한다.

유보적 칭의론, 행위 심판론이 성도가 악행을 끊고 선행을 하게끔 하는 강력한 동인(動因)이라고 생각함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잘못 설정한 오판이다. 행위를 칭의나 구원의 조건으로 삼아야 성도들의 삶이 통제될 것이라 보는 시각은 복음 진리와 상충된다.

김세윤은 '구원파적 구원론' 때문에 한국교회의 윤리적 부재 현상이 도래했다고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죄를 다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탓이라고 한다. 정말 그러한가? 이신칭의를 고백하는 한국교회에는 윤리가 부재한가?

한국교회는 개혁주의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개혁파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율법폐기론이나 무율법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은 따 놓았으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설교하지 않는다. 윤리적 실천이 필요없다고 가르치는 목회자와 신학자는 없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신칭의와 함께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칭의를 선물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성령의 교통과 능력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윤리의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자들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고, 성결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는다.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며 이 둘은 결합되어 있다.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최덕성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어느 신학자는 이신칭의만 가르치고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강조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 윤리가 설 자리가 없다"고 한다. 이 주장은 텍스트보다 콘텍스트에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하는 발상이며, 근거가 불확실하다.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낙스, 번연, 오웬, 차녹, 굿윈이 누구인가? 조나단 에드워즈, 윗필드, 뉴턴, 스펄전, 워필드, 주기철, 박윤선, 한상동은 이신칭의를 믿은 기독인이다. 영국의 설교자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중국 선교사 앤드류 보나르와 윌럼 번즈, 구둣방을 박차고 나가 인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윌리엄 케리는 이신칭의를 확신한 기독인이었다. 그들의 삶과 그들이 섬기던 교회에 윤리가 부재했는가?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말이 있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이다. 불가능한 일을 무리하게 하려 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윤리가 설 자리가 없다"는 주장은 이신칭의, 성화, 성령의 성도 견인 사역 진리에 역행한다. 하나님의 주권, 선택, 자기 백성에 대한 특별한 사랑에 대한 확고한 견해를 견지하지 않는 사고에서 나온 발상이다.

새관점 칭의론과 김세윤 칭의론은 하나님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든다. 칭의를 미완성의 어떤 것으로, 인간이 행위로 완성시켜야 하는 무엇으로 여긴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결국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 종교개혁 칭의론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나아가 교황주의, 곧 사제주의, 고백성사, 연옥 교리에 문을 열어준다.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윤리적 열매가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다양한 까닭이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름뿐인 형식적 신자가 아니겠는가? 열매가 전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칭의, 구원과 무관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새 관점 학파와 김세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기독인에게 성화의 삶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눈높이에 도달하려면, 인간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행위로 구원에 이르는 것과 같이 말하는 성경 표현들이 없지 않다. "나에게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 7:21)", "한 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이 주는 기쁨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배반하고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될 가망이 없다(히 6:4-6)"고 한다.

모범적인 성경해석은 성경의 부분을 전체의 조망 아래서 해석한다. 성경과 신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신학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다. 거짓말 하는 분이 아니다. 사랑은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은 칭의가 인간의 윤리 실천에 달려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칭의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이신칭의는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진리이다. 이른바 유보적 칭의론은 인간 행위를 칭의의 주체로 본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위대성을 간과한다. 성경이 계시하는 복음 진리에 상충된다.

윤리가 빈약한 한국교회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가장자리를 깎아내려 하다가, 중한 조각품 전체를 박살낼 수 있다. 이신칭의의 복음을 희생시키거나 변개하는 방식으로 윤리 빈곤이라는 한국교회의 난제를 손쉽게 해결하려는 시도는,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들과 성도들을 악행에서 멀어지게 하고 선행을 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리포르만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감격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득하면 죄를 멀리하는 삶, 곧 성화가 가능해진다. 개혁신학 구원론, 칭의론, 성화론을 철저히 가르치고 널리 확산하는 노력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윤리 결핍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첩경이다.

바울, 루터, 칼빈이 전한 옛 진리, 비텐베르크, 취리히, 제네바, 스코틀랜드, 평양을 진동시킨 회개의 복음과 이신칭의 진리가 한국을 진동시키는 날, 기독인의 거룩한 삶, 윤리의 열매가 덩달아 풍성할 것이다. 한국을 넘어서는 세계 복음화의 에너지가 가득 찰 것이다.

리포르만다가 주최하는 칭의론 학술회(2016. 12. 12,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는 이상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학술마당이다. 새 관점 칭의론의 역사와 뿌리, 루터의 이신칭의를 둘러싼 논쟁, 루터의 주장이 틀렸는지, 새 관점 칭의론이 잘못인지, 김세윤 칭의론과 로마가톨릭교회 칭의론의 일치 근거 등을 다룬다. 한국교회의 윤리 빈곤에 대한 해결 방안을 논한다. 새 관점 학자들을 비판하던 김세윤이 갑자기 새 관점 칭의론의 옹호자가 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제기될 것으로 예측된다.

최덕성
리포르만다 대표,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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