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이집트의 아이들. ⓒ오픈도어선교회
4. 삶의 영역에서의 박해 정도와 폭력

*박해 유형: 현재 이집트에서 발생하는 박해의 유형은 독재정치와 조직적 부패와 범죄가 혼합된 이슬람 극단주의로 나타난다. 아래에 나타난 노란색 그래프의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에게 가해지는 박해 지수는 올해 9.913으로 작년 9.126보다 상승했다. 폭력 지수는 작년 15.186에서 올해 14.445로 줄어들었다. 이 수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종교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폭력 수준은 여전히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수치는 현재 이집트의 폭력적인 상황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아래 박해 유형에서 알 수 있듯, 지역사회에서 나타나는 박해의 상황은 대부분 시골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지는 형태가 많다. 개인 영역과 가족 영역에서도 박해는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데, 대부분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이 드러난 무슬림 출신 신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콥트교인(Copts)의 세례나 결혼, 사망 신고 불허, 취소 등과 같은 핍박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국가나 교회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박해 지수는 다른 영역보다 조금 낮게 나타난다. 이것은 박해 가운데도 여전히 이집트에 토착 교회가 상당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개인과 가족 영역: 많은 콥트교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과 가족 영역의 박해가 낮은 반면, 무슬림 출신 개종자(MBBs)들의 가정과 친인척 사이에 극심한 억압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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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박해 패턴.(숫자들은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표기) ⓒ오픈도어선교회

*지역사회 영역: 지역사회에서 콥트교인들은 종종 배척당하는 경우가 있다. 조사기관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법과 교육, 기초 사회복지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차별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빈곤층에서 더욱 취약한 형태로 나타난다. 더군다나 이집트인 출신의 콥트교인들은 법정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무슬림과 기독교인 간의 분쟁에서 더욱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몇몇 분석가들은 이러한 상황이 지역 이슬람을 형성한 '부족중심주의'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이러한 소문에는 이슬람 극단주의인 살라피스트(Salafist)들이 배후에는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다.

2015년 6월 4일, 이집트 인권 운동가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 콥트교 신자는 이슬람교에 반대하는 사진을 올렸다는 죄목으로 가족들과 함께 그 지역에서 추방당했다. 이번 추방 결정은 관습법에 따른 결정으로 범죄자와 그 친족들에게까지 형사 책임을 물게 하는 제도이다. 이집트 법정에서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이유로 소수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인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다. 2011년 1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한 반역 이후, 관습법은 더욱 위협적인 상황이다. 관습법은 대부분 불공평한 판결을 내리고 있으며, 특히 취약한 계층인 콥트교인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국가 영역: 종교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으며, 이집트의 법체계는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는다. 2015년 6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는 그리스도인 청년과 그의 친구들이 체포되었다. 그들이 한 노방전도가 이슬람을 모욕했다는 혐의였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라마단 기간에 노방전도 소책자가 든 가방을 소지하고 있다가 적발되어 10,000이집트 파운드(약 1,275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날 수 있었다.

*교회 영역: 콥트교인들은 교회 시설 유지 공사와 허가 등과 같은 행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교회의 자율성은 비교적 존중받고 있다.

*폭력: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원인은 다양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 살해된 기독교인이 최소 12명이며, 그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 납치가 자행되었으며 61곳의 교회가 공격을 당했다. 시나이(Sinai) 지역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 역시 폭력의 점수를 상승시키고 있다. 오픈도어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한 그리스도인 자매는 강간과 납치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기독교식에서 이슬람식으로 계명해야만 했다. 이렇듯 기독교 여성들은 인신매매 범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집트
▲이집트 여인들의 모습. ⓒ오픈도어선교회

6. 전망

1) 이집트의 미래를 결정할 요소는 근본적으로 정치이다. 불안정한 정치와 경제적인 도전 과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사회적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살라프파에서 무슬림 형제단까지)의 다양한 표현방식과 자유민주적 정치 사이에서 빚어지는 사상적, 종교적 이념 차이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2) 오늘날 정치 발전은 딤미튜드(dhimmitude: 이슬람 세력에 대한 이권을 제공하고 항복하며 비위를 맞추는 태도를 일컫는 말)의 상황 가운데 교회의 입지가 국한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무지(無知)가 저항세력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위협은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한 2015년 7월 2일 발표된 외교정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 정부와 IS와 연계된 지하디스트 군(jihadist militants) 사이에 폭력이 확대되었다. 많은 콥트교인이 직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어 시나이 지방을 떠나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시나이 안에서의 폭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집트의 정치 변화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인 아랍의 봄(Arab Spring)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Cairo's Tahrir Square)에서 약 3주간 진행되었으며, 그 여파로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대통령이 사퇴하며 정권이 교체되었다. 2010년 국가 보고서인 베르텔스만(Bertelsmann 2010 Country Report)에 의하면, 정치적 자유와 사회정책 개혁에 대한 요구가 지난 10년 동안 증가하였고, 무라바크 정권은 이미 여러 반대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이집트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시위는 사회적 대중들의 불만을 해소시켜 주지 못한 무바라크 정권의 실패가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9월, 무르시(Morsi) 정권은 이전 정권의 대표자인 아흐메드 샤피크(Ahmed Shafik)를 상대로 52%에 해당하는 투표수를 얻으며 논란이 일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무르시 대통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의 폭넓은 지지 때문이 아니라 이전 정권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적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은 일단 사업부와 행정부를 통제하였으나, 국민적 합의 정책을 시행하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무르시 대통령이 취한 일련의 조치들, 특히 2012년 11월 2일에 있었던 입헌선언을 통해 그는 독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집트인들에게 무르시 정권은 무능하다는 인식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독재주의를 지향함으로써 타마로드(Tamarrod)라 불리는 단체에 의한 대중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시위 주동자들은 2천 2백만 명의 이집트인으로부터 서명을 받고, 2013년 6월 30일 무르시 대통령의 사임 압박과 조기 총선 준비를 목표로 하는 대규모 시위를 표방했다. 무르시 대통령은 이런 요청을 무시했고, 자신의 원칙을 향한 대중의 요구와 불만을 묵살했다.

이집트
▲이집트의 야경. ⓒ오픈도어선교회
타마로드 단체는 무슬림 형제단 외에도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무르시 대통령의 행실뿐 아니라 악화되는 경제상황을 해소시켜 주지 못한 무르시 정권에 불만을 가진 다수의 사람에게 지지를 받았다. 타마로드의 캠페인은 경찰과 군대, 사업가들을 비롯해 이슬람교와 콥트교 종교계의 저명인사들의 지지 또한 받았다. 결국 군부가 개입함으로써 무르시 대통령이 사퇴하게 되었다. 군부는 새로운 헌법과 총선 및 대선에 대한 가이드를 채택함으로써 군부적 과도기 정권을 취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압둘 파타 알시시(Abdul Fattah al-Sisi) 육군 장군이 새로운 이집트의 강자로 떠올랐다. 무르시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국방부 장관이었던 그는 대통령 사퇴를 지시한 주요 인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압둘 파타 알시시를 무슬림 형제단으로부터 이집트를 구한 영웅으로 묘사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군부 세력을 등에 업은 기존의 독재정치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새 헌법이 채택된 후, 알시시는 민간인으로서 대통령에 출마했다. 선거에 앞서 그를 우상화시키려는 지지자들을 고려해 보면, 압도적인 지지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알시시가 정권을 장악한 후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대규모 탄압이 자행되었고 무르시 전 대통령을 포함한 고위 지도자들이 구금되고 핍박 받았으며, 사형선고 또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무슬림 형제단이 이집트 사회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며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들은 깊은 사회의 양극화를 초래했다. 알시시 대통령은 이집트의 정치 상황을 정상화시키고, 페르시아만의 셰이크돔(Sheikdom)으로부터 넉넉한 재정지원을 받아 경제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안보상황의 안정과 시나이 사막의 북쪽에서 활동 중인 과격 테러단체들을 상대로 전쟁을 이끌어야 하는 난제들에 직면해야 했다.

전체적으로, 이집트는 어떤 면에서는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지배했던 시절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힘을 가진 또 다른 세력이 무슬림 형제단에게 탄압을 행사하며, 무장한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의 반란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 형제단의 단원들 및 지지자들은 반대세력을 분산 또는 자신들의 세력으로 흡수시킬 수 있는 역량뿐 아니라 알시시 정부의 경제적 성과가 결국에는 이집트와 주변 지역의 안정화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알시시 정권은 무르시 전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의 지휘 아래 세력이 증가한 이슬람화의 위험을 없애고 이집트 내의 기독교인들에게 안정과 질서, 안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동시에 권력 상실과 박해로 인해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무슬림 형제단과 지지자들이 점점 과격해지는 무장 이슬람 단체에 가입할지도 모르는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전개는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부추겨 나라의 안정과 장기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의 안정에 심각한 위험을 가할 수 있다.


이집트
▲이집트의 예배자 청년들. ⓒ오픈도어선교회

이집트 교회의 실상과 역사

2016년 UN에서 추산한 이집트 인구는 총 9천3,384만 명이며, 인간문명의 발상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전 세계 기독교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기독교 인구는 905만7천 명이다.

이집트 인구의 대부분은 토착 아프리카인과 아랍계 혼혈인이며, 공식언어는 아랍어이다. 기독교와 이집트는 예수님이 탄생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매우 긴밀하다. "그(요셉)가 일어나 밤에 어린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것은 주에 관하여 대언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함이더라. 이르시되, '이집트에서 내가 내 아들을 불러내었노라' 하셨더라."(마태복음 2:14~15, KJV 흠정역). 예수님의 제자 마가는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 이집트 북부 항구도시)에 세워진 초대교회로 부름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는 교회 생활에 있어 중요한 부분인 기독교적 기도원 생활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수 세기 동안 이웃한 기독교 국가들과 단절된 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콥트교인들은 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잔존해 왔다. 5세기 동방 정교회로부터 분리된 이후, 콥트 정교회는 자생적으로 유지되어 왔으며, 종교적인 믿음과 예배 형식이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돼 왔다.

콥트 정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삼위일체에 대한 본질의 차이 때문이다. 이집트 콥트 정교회는 451년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451년 10월 8일~11월 1일까지 터키 칼케돈에서 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의 요청으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내용을 부정했다. 7세기 아랍의 침략은 이집트 내 기독교 부흥을 가로막기도 했다.

17세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카푸친회와 예수회 등 수도회 선교활동의 목적으로 이집트에 들어왔다. 1847년 앵글리칸 영국 성공회교도들이 이집트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1854년 미국에 기반을 둔 연합개혁 장로교회가 이집트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잇달아 수많은 독자적인 종교단체와 선교단체가 이집트로 들어왔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1899년 이집트에 들어 온 자유감리교회이다. 1956년과 1967년에 일어난 전쟁은 복음주의 사역을 가로막았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내 다수의 콥트 교회는 서로 다른 교파가 여럿 존재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정교회 △가톨릭 △아르메니아, 갈대아, 그리스, 멜키, 로마, 시리아, 마론파교, 정교회 △그리스, 시리아, 영국 성공회/스코틀랜드와 미국 내 영국 성공회 △개신교 등 많은 종파가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개신교는 장로파(Presbyterians), 침례교(Baptists), 형제교회(Brethren), 열린 형제교회(Open Brethen), 그리스도 모형교회(Christian Model Church; Al-Mithaal Al-Masihi), 사도 교회(Apostolic), 하나님의 은혜(An-Ni'ma), 펜테코스트파(Pentecostal), 사도의 은총(Apostolic Grace), 그리스도 교회(Church of Christ), 복음 선교(Gospel Missionary: Al-Kiraaza bil Ingil), 네덜란드 교회의 전갈(the Message Church of Holland; Ar-Risaala)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집트 내 기독교인들이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요약하면, 곧 기독교인과 교회를 공격하는 이슬람 과격분자들, 사회적 차별, 토지를 빼앗는 일,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억압적인 법안이라고 할 수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