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과학 해석에 대한 칼빈의 신학방법론

과학의 영역 해석에 대한 칼빈의 방법론은 무엇이었을까?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3 가지 칼빈의 공헌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칼빈은 자연에 대한 과학연구에 대해 긍정적 활력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둘째, 칼빈은 과학 연구의 장애물을 제거한 인물이다.
셋째, 칼빈은 성경을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가지고 이해하려 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을 위해 보통 학교를 개설하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생각은 적응의 방법으로 나아간다. 이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아버지가 어린 자녀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할 때 겪는 것과 동일한 문제에 부딪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낮추어 내려 오사 우리의 연약한 점에 자신을 맞추신다. 이것은 유아원 선생님이 유아 언어로 말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면서 자녀들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나 비슷하다. 제한 된 지성의 어린 아이에게 그들의 이해와 경험을 능가하는 말과 개념을 사용할 경우 의사 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아이 수준에 맞는 방법이 요구된다. 이 접근 방법은 칼빈에 의해 적응이라는 용어로 언급된다.

수사학으로서의 적응

적응(Accommodation)은 라틴어의 수사학자나 법학자들이 청중들의 상황, 구조, 성격, 지적수준, 감정 상태 등에 적응 시키며, 조절하며 적합하게 진행하는 사용법이다. 이 적응의 원리를 일찍부터 이용한 사람 중에는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m), 어거스틴(Augustine) 등의 교부들이 있었다. 적응의 방법은 일상의 언어와 전문가 사이의 담론의 긴장을 해소하는 도구가 된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화상을 그리신다. 즉 인간의 지성과 마음의 능력에 적응하신다. 좋은 웅변가는 청중의 한계를 잘 알고 거기에 적응한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으로 오시기 위해 몸을 굽히셨다. 하나님은 때로 입, 눈, 손, 발을 소유하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고 하였다.

칼빈이 본 창세기

창조에 대해 칼빈은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의 이해를 받아들인다. 이들 견해의 특징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칼빈에게 있어 물체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이방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하나의 우화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조화의 하나님이요 완벽한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과학의 문제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므로서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당대의 지성인이 아닌 단지 미개인까지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 방식으로 성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해와 달에 대해 칼빈은 창세기가 철학적으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 밝게 우리들에게 비추는지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신비한 세계를 더욱 탐구하려면 성경이 아니라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보기에 창세기를 서술한 모세는 과학의 언어가 아닌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만일 모세가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그에게 호소했을 것이다."

이렇게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사람들의 수준과 능력에 적응한다. 이것을 문자적 묘사로 보면 안 된다. 창세기의 기자는 학식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우지 못하고 원시적인 사람들의 교사로도 임명되었다. 그 때문에 창세기 저자는 배우지 못한 조잡한 교육 수준의 입장에 서지 않고는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김성봉 박사(전 안양대 신학대학원장, 조직신학)는 칼빈의 이와 같은 적응의 방법이 현재의 삶을 위한 목회적 관심까지 염두에 둔 해석 방법임을 상세히 분석한다. 그렇게 볼 때 칼빈에게 있어 창조의 6일은 24시간의 여섯 단위가 아니었다. 칼빈은 순간 창조 개념을 반대하였다. 성경은 기원전 4 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었다. 확장된 시간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사고 방식에 적응한 것이었다. 칼빈은 그에 따라 궁창 위의 물도 구름에 적응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창조과학(creation science)과 조금 다른 해석 방법이다. 즉 칼빈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적응된 것이다.

과학적 해석의 부담에 대한 칼빈의 자유함의 근원

여기서 필자는 칼빈이 당시의 과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과학적 해석이 필요할 경우 당연히 일부 잘못 해석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본다. 과학자들 조차 결국 시대를 반영한다. 따라서 과학자들도 당연히 다양한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과학자들을 모두 오류 투성이의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칼빈도 당연히 제한적 지식 아래 잘못 말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응 이론 아래에서 칼빈은 자신이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 있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담에 대해 자유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이런 것이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성경 주석이 미숙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칼빈은 성경 원문을 철저하게 연구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탁월한 성경 원문 연구가였던 것이다. 이런 자세는 당시 유럽의 인문주의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성경 해석에 있어 과학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대충 넘어가는 수준의 능력이나 성품을 지닌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칼빈은 성령이 "저속하고 교육받지 못한 무리들로 하여금 배우는 길을 막아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함께 말을 더듬거리는 쪽을 선택했다"고 주석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몸을 떠는 방식으로 몸을 떠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칼빈이 보기에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지동설에 대한 비판에 대항해서 수학적 물리적으로 난해한 점들까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 모세나 선지자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모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자신을 적응시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과학적 해석의 부담에 대해 자유함을 가졌을 거라는 충분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칼빈과 유신진화론

그렇다면 진화론에 대해 칼빈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생물의 "종류(min)"라는 말은 창세기 1장 11절에 처음 나타난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종류대로의 창조의 문제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종류는 창세기 1장에서 엘로힘(Elohim, 40회)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10회)이다. 그럼에도 칼빈은 이 언어를 아주 일반적으로 평이하게 서술한다. 진화론은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1859)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자연 과학의 주요 이슈가 된다. 칼빈의 시대는 아직 과학 이론으로서의 진화론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대였다.

칼빈은 종류대로라는 이 단어를 주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창세기를 주석하는데 있어 당시의 수준에서 단순한 언어로 묘사하려는 입장을 지속한 듯하다.  칼빈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불충분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 계시란 칼빈에게 있어 약간의 섬광과 같은 것으로 비쳐진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러한 광명 속에서 명백히 계시되어지지만 우리의 눈이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해 조명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설명한다(롬 1:19). 칼빈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계시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기술 시대에도 성서해석 방법으로서의 칼빈의 "적응"의 적용은 유효한가

적응의 방법은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가?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적응"의 문제가 역사적으로 핵심적인 중요한 논제는 아니었으나 성서 해석과 신학 구조와 관련되어 지속적인 이슈였다고 주장한다. 존 딜렌버거(John Dillenberger)도 적응의 문제는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자연 과학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분명히 중요한 이슈의 하나였다고 본다. 칼빈은 결코 과학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열린 신학자였으며 과학 연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신학자였다. 물론 칼빈도 간혹 과학적 이론을 바르게 그의 해석에 사용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적응의 방법 아래에서 그런 작은 오류는 그의 신앙이나 성경 해석 방법에 누(累)가 될 수 없었다. 성경의 중심은 과학이 아니라 그 과학을 만드신 주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영생의 소망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서의 기록자들조차 "잘못된 견해에 적응하면서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면에서 과학에 대한 칼빈의 태도는 늘 긍정적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은 하나님의 지혜를 들어낼 수 있으며 특별 계시로 재해석되어 하나님을 높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도구였다. 과학의 문제에 있어 해석 방법과 관련하여 적응의 방법을 일관되게 사용한 칼빈은 과학 혁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를 살면서 적응이라는 해석 방법을 통해 성경 해석이 모든 역사, 온누리를 향한 적응된 해석이 되어야 함을 자신의 저작에 일관적으로 흐르게 적용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해석 방법은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이 방법은 복음 전파와 신앙의 삶에 있어서 문제도 되지 않을 뿐더러 전혀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루터와 달리 칼빈이 보기에는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과학자도 무조건 비난의 대상이 될 신학자는 아니었다. 과학의 생소한 이론이나 법칙이 발견되었을 때 적응의 방법은 때를 기다린다. 그는 모든 학문을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보았던 것이다.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때 우리는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의도적이지 않은 이상 실수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진다. 하나님조차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하여 낮아지셨는데 우리 인간이 어찌 실수가 없겠는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어떤 근본주의적 분리주의 경향도 교만의 반영일 수 있다. 칼빈은 이점을 잘 아는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은 칼빈 시대나 모세 시대만의 하나님은 아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상황과 과학의 발달을 분명 예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성경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는 현재의 책이요 미래의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학 만능, 과학주의가 만연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적응은 어떤 것일까? 또 미래에의 적응은 무엇일까?

적응의 방식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과학의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의 적극성)

적응이란 단순히 소극적인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는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촉진하였고 학문의 영역을 회복 시켰을 뿐 아니라 학문을 부자유스러운 속박에서 건져내었고 칼빈주의는 학문적 갈등에 대한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학문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학문의 최종적 결과 또한 학문의 자유 아래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가 적극적으로 과학의 문제에 뛰어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쟁과 협상 없이 승리하는 전쟁이란 없다. 칼빈이 말한 '성령의 겸손(condescension)'에 의지하여 학문적으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겸손히 기다리는 것과 복음의 마지노선을 지키며 양보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진리는 적응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복음주의 과학관은 분명 칼빈이 사용한 적응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적응의 방법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현대적 이슈를 해석함에 있어서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먼저, 사랑과 평화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사랑과 평화의 질서였다. 이 사랑과 평화는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와해(瓦解)되었다. 적응의 방법은 이 하나님의 본래 사랑과 평화가 어디에 있는 지를 추적한다. 즉 기독론적 사랑과 평화가 창조와 구속에 모두 적용된다고 보는 개념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 관계가 없다. 지명수 박사(안양대)는 모든 복음이 그 핵심 내용에 있어 동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초의 축복은 가장 넓은 함의와 적용을 갖는 말씀으로 보고 이 최초의 축복을 최초의 복음, 창조의 복음이라고 불렀다. 이 창조의 복음은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축복이 포함될 것이다. 이것은 생태계나 생명 윤리 등을 다룰 때에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신현수 박사(평택대 부총장 역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의 실현의 행위로서 샬롬(shalom)의 신학을 제안한다. 구약의 평화는 기본적인 어떤 것으로 사회적, 역사적 및 다른 형태의 변화도 그것의 기본 의미를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생명, 갈증 혹은 기쁨 등과 같이 변화 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다. 평화는 모든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의 부분으로 공동체의 완전함, 건강함, 흠이 없음을 추구한다. 이것은 복음주의 과학관 안에서도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와 성경에 그 뿌리를 둔 하나님의 샬롬의 과학, 하나님의 과학으로서의 샬롬, 즉 하나님의 질서의 샬롬을 촉구한다 할 수 있겠다.과학의 어느 부분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지향하는 가는 복음주의자들의 끝없는 고민이다.

기독 과학 철학자 델 라치(Del Ratzsch)가 말하는 '사랑 안에서 진리 말하기/발에 관한 몇 가지 생각'(Speaking the Truth in Love/Some Thoughts About Feet)도 흥미 있는 제안으로 그 중 하나의 도구일 수도 있다. 델 라치는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서 논쟁 할 때의 세 가지 원칙으로 첫째. 말할 때(Speak) 공동체 내부를 쉽게 깨뜨리는 누(累)를 범하지 말 것(토끼 발을 모두 잘라 버리는 발이 되지 말 것) 둘째, 당신의 입에 당신의 과학적, 신학적 또는 철학적 발을 집어넣지 말고 참 진리(the truth)를 찾도록 애쓸 것(입에 이런 것들이 들어가면 말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어 짐) 셋째, 사랑 안에서(in love) 한 몸을 이루는 (복음의) 친구들에게 총을 쏘지 말 것(그것은 자신의 발을 쏘는 것이요 엽총으로 티눈을 잘라내는 격이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중에 델 라치가 보기에 제일은 사랑이다. 필자가 보기에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안에서 한 몸이다.

둘째는 겸손과 기다림의 방법이다. 심오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조차 우리 인간을 위해 눈높이를 낮추었다.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부족해서 였다. 적응을 오해하여 성경을 가지고 남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잘못 정죄하는 누(累)를 범하면 안 된다. 적응의 이론은 인간이 지닌 능력과 한계를 모두 인정하고 성경이 명확하게 계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잘못 적용하여 잘못된 정죄의 오류에 빠지지 말게 하며 겸손히 때를 기다린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는 자연 계시가 구원적 가치(salvific value)에 있어 완전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보다 앞서 자신의 주장을 계시보다 우월하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일반 계시의 점진성을 따라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과학과 신학의 충돌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부분에서 고려될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세속 도시의 발달에 대해 부정적인 프랑스의 자크 엘룰(Jacque Ellul)은 현대의 과학 기술이 기독교적인 인간관, 사회관과 충돌한다고 보는 반면 하비 콕스(Harvey Cox)는 기독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많은 학자들이 양편의 입장으로 갈라서게 된다. 세속 도시와 과학 기술의 부산물 가운데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보게 되는 면에서 복음주의는 양쪽 측면을 관찰하면서 좀더 겸손히 적응의 때를 기다림이 옳다.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발생하는 성경 해석 상의 모순과 대립을 감정적으로 대처해서 자신의 견해만 진리라 여기고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판넨베르그도 이런 적응 이론이 성경의 영감론을 반대하는 게 아니요 말씀 가운데 모순과 대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언급한다.

셋째, 명료성이다. 겸손과 기다림으로서의 적응은 단순한 소극적 대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명료성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당시의 창조 섭리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명료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진화론이 과연 성경적 이론 인가 그렇지 않은가하는 문제는 명료성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즉 성경과 과학(자연 계시)과 피조 된 인간에 부여된 도덕과 양심에 따라 종합적으로 살펴 볼 때 진화론은 결코 복음주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여기서 진화론은 명료하게 부정된다. 진화를 부정하는 것은 복음주의의 마지노선인 것이다. 다만 그럼 언제 우주와 생명과 인간이 창조되었는가의 문제는 복음주의자들 안에서도 첨예한 문제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겸손과 기다림의 적응이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이때는 겸손과 기다림 자체가 명료함인 것이다. 필자 개인의 생각은 생물 진화와 달리 우주 기원론, 지질과 지형학, 층서학, 문화적 발달과 관련된 부분은 분명 생물 진화와 구분할 수 있다. 영역에 따라 진화라는 말을 발달, 발전, 진보, 진전, 변이, 변천, 프로세스 등의 말로 대체 또는 치환하여 적극적으로 관련 전문 기독학자들(유신론적진화론자들)과 활발하게 토의할 수 있다고 본다.

넷째, 적응의 적극성이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를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깨닫게 만드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과학에 대해 게으르지 말고 연구하며 접근해 갈 것을 요구한다. 과학은 가만히 고여 있는 물이 아니다. 늘 방향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접근한다. 적응 이론은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 성경과 과학과 삶 안에서 우리가 가장 합당한 대답을 이끌어낼 것을 요구한다. 즉 적응 이론이 세상을 향한 결코 소극적 대처 방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적응의 방법은 우리에게 자유함을 준다. 적응의 방법은 우리들이 성서 문자주의자가 되려는 유혹을 방지한다. 더불어 구원의 핵심이 아닌 창조의 영역의 문제(adiaphora)에 있어서는 보다 자유함을 가지고 자연의 노예나 폭군이 아닌 사랑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생태와 환경은 단순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 자체가 다차원적이다. 이런 다변적 환경에서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과 청지기적 사명은 분명 적응의 원리의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과 관련된 성서 해석에 있어 칼빈의 적응 방법과 이론은 과학 기술 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