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기독문학세계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2009년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헤르타 뮐러를 지정한다. "응축된 시정과 산문의 진솔함으로 소외층의 풍경을 표사했다"는 것이 선정 이유이다.

나들이 나온 꿩 가족 스토리를 형상화한 수상작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라는 작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꿩 이야기와 대작의 명예를 안은 문학작품을 동시에 화두로 삼고자 한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루마니아 차우체스쿠 독재정권이 독일 소수민족들을 극심하게 탄압하던 때의 일로써, 루마니아 작은 시골 마을에서 고역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던 가난하고 희망 없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제분업자 빈디시 가족은 전체주의의 불안과 공포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꿈이 있다. 그것은 출국허가증을 받아 서구 세계로 탈출하는 일이다.

출국허가증을 받기 위해서는 브로커에게 엄청난 돈을 주어야 한다. 빈디시는 쥐꼬리만한 품삯을 모아 보지만, 출국허가증 값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몸은 영양실조로 시체처럼 말라가는데, 출국허가증을 사 주겠다는 브로커는 금품만 계속 요구한다. 그는 끝내 가정도 파탄에 이르고 딸의 인생도 나락으로 추락한다. 동시에 빈디시의 꿈은 산산조각난다.

빈디시에게 출국허가증은 무엇이었을 까? 꿩의 날개였다. 꿩의 날개는 퇴화되어, 위기의 순간 박차고 날아갈 수도 없는 어설프기 그지없는 짐에 불과하지만, 버릴 수 없는 꿈이고 희망이었다. 그 때문에 비열하고 비굴할지라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었다.

루마니아 여행길에서 한날 닥터 디미타 씨 부부의 안내로 보르네트 수도원에 가게 되었다. 수도원은 카타르티아 산맥 기슭 근처에 세워진 부코비나의 채색 수도원중 하나이다. 화려하고 정교한 프레스코와 벽화가 놀랍게 건물의 안팎을 장식하고 있다. 해질녘 수도원은 평온했고 우아하고 적막했다. 이름 모를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섞여, 야트마한 언덕 위에 한 무리의 꿩들이 푸더덕 푸더덕 날아다니고 있었다. 스무 마리는 넘어 보이는 꿩떼가 요란스럽게 푸덕여 날개를 뒤흔들며, 비둘기 떼처럼 노을 속을 치솟아 올라가는 듯 했다. 그러나 새처럼 날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누군가의 시가 생각났다.

"장끼가 날아가네/ 날개를 퍼덕이며/ 내가 그걸 생각하면/ 내 마음만 괴롭구나."

문학에서의 꿩은 인간과 대비되는 속성을 띤다. 꿩은 다른 새와 달리 빛이나 광명의 세계를 암시한다. 꿩은 늘 비상에의 꿈을 꾼다. 빛의 세계에 대한 욕망과 비상에의 욕망은 생명성에 대한 꿈이며 희망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꿩은 다른 새처럼 날지 못한다. 노을 속을 날아오르는 다른 새들은 무지개를 만들지만, 꿩은 영원히 땅 주위를 맴돌며 무지개만 꿈꾼다. 시인의 괴로움은 이 때문이다.

그 날, 운동 중에 내가 만난 꿩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가자. 새끼들 한가운데 우뚝 서서 고개를 곧추세우고 있는 까투리가 있다. 그놈은 반대편 언덕을 주시하면서 흡사 꺼벙이들에게 출발 명령을 내리려는 기세이다. 그때 푸더덕 소리와 함께 열두어 마리의 꿩 무리가 일제히 반대편 언덕을 향해 낮게 날아올랐다.

헤르타 뮐러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르타 뮐러. ⓒnobelprize.org
꿩떼를 따라 시선을 옮기는 순간, 나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곳 파3홀 언덕 위에 깃이 참으로 우아한 장끼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끼는 우아한 깃을 가지고 있고, 새하얀 목 위로 오뚝 솟은 선홍색 볏이 눈부셨다. 볏은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양귀비꽃인들 저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장끼를 향해 날아온 꿩 무리가 그를 둘러쌌다. 까투리와 장끼는 이마를 맞대고, 꺼벙이들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첫 비상을 무사히 마치고 안착한 기쁨의 몸짓일 터이다. 꿩 가족의 날개로 덮힌 언덕은 다시 햇살을 받아 금빛이 되었다. 그 광경은 한 폭의 수채화이고 위대한 문학이었다.

아아, 순간 내 속 깊은 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비록 이루기 힘든 꿈일지라도, 그 꿈을 꾸며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생명처럼 지니고 사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그때 비로소 꿩의 비상은 저 하늘의 구름을 뚫고 별빛에 젖어들어 창조한 이의 가슴에 닿는 것이구나. 인간이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라 말할 수 있음은, 영원을 사모하며 사는 우리의 삶을 그가 닮았음이리라.

페어웨이를 밟는 나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