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선교사
▲이승하 목사(왼쪽)가 발제하고 있다. ⓒ김은애 기자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사장 박옥선, 원장 유정우)이 6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연구원 사무실에서 제218회 월례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제목으로 발제했다.

이승하 목사는 "한국교회에서는 토마스 선교사가 선교사이며 순교자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데,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한국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발제를 시작했다.

이 목사에 따르면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는 것에 이의가 제기된 것은 이만열의 1985년 '한국교회사 특강'이다.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에 입국할 때 중무장을 하고 불법으로 들어온 제국주의 침략선인데 그 배를 타고 온 사람이 선교사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토마스 선교사가 죽으면서 성경을 전해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순교자로 봐야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이 기록된 역사적 사료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다"고 했다.

이에 이 목사는 "토마스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재평가는 한국교회가 영웅으로 받들었던 인물에 대해 신비를 풀어야 한다는 데서 나왔다"며 "먼저 역사적 문헌에 근거해 토마스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역사적 초상화를 그려야 하고, 그후 토마스의 한국 선교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평가를 해야 선교학적으로 논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 기독교사의 일분수령'이라는 소책자를 펴낸 오문한은 토마스 목사의 진정한 모습을 알려고 황해도, 백령도를 거쳐 평양 대동강까지의 경로를 직접 답사해 현장을 살피고 증인들과 대화해 실증적 자료를 수집했다"며 "그가 얻은 결론은 '토마스 목사는 진정 선교사였으며 순교자였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선교에 대해 살핀 이 목사는 제너럴셔먼호의 최후 상황에 대해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평양에 정박하고 있던 이상한 서양 선박이 점점 더 미친듯이 날뛰며 닥치는 대로 포를 발사하며 민간인들을 죽였다. 그 배를 무찌르기 위한 유일한 군사작전은 불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군사들은 불이 타오르는 작은 거룻배들을 떠내려 보내 그 선박을 공격하여 완전히 불태웠다."

이 목사는 "이렇게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토마스 선교사는 뱃머리에서 홀로 '야소, 야소'를 외치고 성경을 뿌렸다"며 "물가로 끌려나온 그는 대동강 백사장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기 시작했고, 모래투성이에 흠뻑 젖은 토마스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가슴을 더듬어 품안에 있던 성경을 꺼내 앞에 선 관군에게 건내고, 병사는 순간 주춤했으나 그의 칼은 토마스의 가슴을 꿰뚫고 말았다"며 "병사는 그 책이 성경인 줄도 모르고 품에 넣어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했다.

이 목사는 "토마스 선교사는 자신의 생일을 이틀 앞둔 1866년 9월 5일 대동강 쑥 섬 모래사장에서 순교했으나, 그가 꿈꾸었던 비전은 사그라진 것이 아니었다"며 "여러 난관과 자기 약점을 부수고 뛰어넘으며 오로지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헌신한 그는조선 땅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순교의 피를 뿌린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순교자라는 판단은 하나님의 몫"이라며 "거기에 인간이 판단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조선에 '한알의 밀'이 되었고 그 열매가 한국교회 역사에 뚜렷하게 나타났다"며 "이런 면에서 볼 때 토마스 선교사는 진정 선교사였으며 진정 순교자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