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달려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6-7)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죽음을 계기로 역사적 위기의식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성전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뵙는 신비한 영적 경험을 가졌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된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깨우치면서 그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그동안 이사야는 나름대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최선을 다한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 그는 부정한 입술을 지닌 채 부정한 백성들 속에 살아온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바른 깨우침에 근거한 '메타노이아'로 이사야는 곧바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았다. 하나님을 모시고 서있는 스랍 중 하나가 성전 제단에서 핀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고 선언하였다. '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본'은 형벌을 포함한 죄의 결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악이 제하여졌다'는 것은 형벌의 기록이 말소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죄'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타아'는 과녁에서 벗어난 본질적인 죄를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사하여주신다는 것은 죄를 덮어주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사야가 활동하였던 구약시대는 죄 용서를 받기 위하여 수송아지나 숫염소를 제물로 잡아 드리는 것이 필요했다. 이사야는 그런 속죄의 제물을 드리지는 않았다. 그가 드린 것은 입술의 제물 곧 회개였다.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라'고 한 것도 참다운 회개를 촉구하는 호소였다(호 14:2).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시 51:17).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난 후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자신의 죄를 깨우치게 된 것이나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된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거나 특별한 복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자체도 하나님 형상으로서 할 일을 맡기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함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강조되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사야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였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특정 사람을 지명하여 부르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특별히 지명하여 부르시지 않으셨다. 누구를 보낼지를 물색하며 찾고 계시다는 내용만을 전달하셨다. 일종의 공개입찰 형식의 부름인 셈이다. 준비만 되어있다면 누구라도 부름에 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명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다. 문제는 그 사명을 누가 먼저 깨닫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이냐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의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이사야야말로 가장 잘 준비된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면서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할 일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였다. 그 이유는 "염려하건데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기로 이미 결정하셨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지칭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의 동족에게 심판을 선언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공개입찰 형식으로 보낼 자를 찾으신 것도 그 E문인지 모른다. 하나님의 사명을 맡는다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늘 즐겁고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부담되고 힘든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팔복 중의 마지막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이다.

부담을 느낀 이사야는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이니까?"라고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더욱 혹독한 일들을 일러주셨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 6:11-12) 그렇다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황폐되어도 그 중에 남겨둘 십분의 일이 거룩한 씨가 되어 그 땅의 그루터기가 된다는 것이다(사 6:13).

누가 과연 그 땅에 남겨지게 될 '거룩한 씨'일까? '거룩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몫이다. '씨'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의 소유자이다. 전후 문맥으로 보아 '거룩한 씨'의 대표적 모델은 이사야 자신이다. 그런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한 '메타노이아'를 통해서 얼마든지 더 많이 양육될 수 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거룩한 책망하심으로 하나님의 '메타노이아'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들에게 넓게 열어놓고 계신다. 그리고 시대적 사명을 위하여 우리들이 자원하여 나서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