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사 6:5)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이사야의 '메타노이아' 경험과 함께 그에게 특별한 사명이 부여된 소명체험이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인 '메타노이아'(회개)는 거듭남의 경험과 함께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소명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나라는 각자가 하나님 형상으로서 맡겨진 역할과 기능을 다하는 곳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존재적 신분(being)이 우선적이지만, 그것은 곧 '제사장 나라'라는 존재적 기능(doing)으로 이어져야 한다(출 19:5-6).

이사야의 소명 체험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있었다. 웃시야 왕은 다윗-솔로몬 이후 가장 위대하고 신앙심이 깊은 왕이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라는 뜻의 아사랴이었는데, '여호와는 나의 힘'이란 뜻의 웃시야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16세에 등극하여 52년의 긴 기간 동안 통치하면서 홍해 해변의 에일랏 항구를 재건하였고, 블레셋과 암몬 등 주변의 적대국을 정벌하였다. 그는 또한 새로운 방어기술을 도입하여 예루살렘을 수축하는 거국적인 토목공사도 이루었다(대하 16:15).

그러나 웃시야 왕은 그의 통치 말년에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를 범하였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향단에 분향을 한 것이다. 그 일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제사장은 왕을 제지하였다. 그러나 웃시야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그 일을 강행하였다(대하 26:18-19). 이에 하나님께서는 웃시야를 치시어 그에게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다. 그 일로 인하여 웃시야 왕은 별궁에서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나라의 통치권은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였다.

웃시야 왕의 교만과 그로 인한 불행은 당시 사회 전체가 직면하고 있었던 영적 혼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의 유다는 내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상태였다. 이사야서의 첫 5장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교만, 욕심, 거짓, 거짓, 불의, 불공평한 재판, 형식적인 종교, 극심한 우상숭배, 공동체의 붕괴 등이 사회 전체 속에 만연해 있었다.

그런 내적 타락과 혼란 속에서 외부의 정치적 여건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인 주전 735년은 그동안 약체로 있었던 앗수르가 고대근동의 대국으로 등장하면서 주변국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시작한 때였다.

웃시야 왕의 죽음은 이사야에게 여러 면에서 충격과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가장 훌륭하게 평가되는 웃시야 왕의 비참한 말로와 죽음은 그에게 무엇보다도 큰 충격이었다. 거기에 앗수르라는 신흥세력의 발흥과 그로 인한 국제정치적 위협이 점증하는 새로운 시대는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이사야의 반응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기도는 결코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문제의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적극적인 현실참여이다.

그곳에서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의 하나님 경험은 시각, 청각, 감각 등 세 분야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이사야의 '메타노이아'로 이어졌다.

(1) 첫째는 시각을 통한 경험이었다. 그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를 보게 되었다.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그 주변을 스랍들이 모시고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둘로는 얼굴을 가리었고 둘로는 발을 가리었고 둘로는 나는 모습이었다.

(2) 둘째는 청각을 통한 경험이었다. 보좌 주변에 서있는 스랍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는 내용의 찬양을 하였고, 그것은 청각을 통하여 이사야의 마음을 움직였다.

(3) 셋째는 감각을 통한 경험이었다. 스랍들의 찬양소리로 인하여 성전 문지방 터가 요동하였고, 연기가 성전 안을 가득 채웠다. 이사야는 그것을 온 몸으로 직접 경험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사야를 찾아오셨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게 되었다. 이사야는 자신의 죄와 더불어 동족의 죄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였다"는 고백이다. '입술'은 마음에 들어 있는 내용을 겉으로 드러내는 통로이다(욥 33:3; 시 21:2).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곧 마음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성경은 마음과 입술의 일치를 강조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외식하는 것이 된다(사 29:13; 마 15:8; 막 7:6). 야고보서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런 사람은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였다(약 3:2). 입술이 사람의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입술'은 내면의 생각과 겉으로의 행동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생각과 행동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음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회개이다.

죄의 자각은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이 초라한 인생인가를 드러내 준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절망을 표출하였다. '망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다마'는 어원적으로 '끊어지다'를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뜻이다. 실제적인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영적인 죽음인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아무리 건강하게 숨을 쉬고 산다고 하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살아있다는 의미가 상실된 것이다.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잎에 선 것 자체가 이사야에게는 '성령의 책망하심'이 되었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