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원
제1장 교회

1. 교회의 속성(Nature of the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적합한 정의는 무엇인가? 교회의 자질들과 특권들, 표지들 또는 구분되는 특징들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논의할 만한 것들로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 질문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벌어진 깊고 영향력 있는 논쟁의 주제들이었다. 교황주의자들은 개신교도들과 논쟁이 시작되면 교회에 대한 일반적 주장들에 우위권을 나타내고자 항상 조마조마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의견에 있어 전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경 안에 제시되고 있는 것 같이 교회에 대한 일반적 주제에 대해 말할 무엇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과 개신교도들 사이에 논의된 특별한 교리들과 관련하여 실제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회에 대한 일반적 주제에 대해 그들이 굳게 붙들고 있는 견해 때문이다. 즉 세워진 가톨릭교회가 개별적 모든 교리적 논쟁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한 견해로 인해 나타나는 실제적 결과는 그들이 교회를 모든 은혜의 배포자요 진리의 중보적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방(room) 안에 세워둔 것이다. 또한 적어도 하나님 말씀의 방 안에서 교회를 신앙의 유일한 잣대로 세워둔 것이다. 물론 그 결론은 인간이 교회가 반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신들을 복속시켜야 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에 서 있는 로마교 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세우신 교회는 매우 독특한 단체로서 항상 지속적으로 결함이 없는 단체요, 언제나 존재하며 가시적으로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교회가 모든 다른 기관들, 시민법적인 것들 혹은 교회적 기관들과 구분되는 것이요 오류에 빠지지 아니하고 언제나 진리만을 반포하는 기관으로 믿고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나의 교회는 언제나 가시적이요 무오한 로마의 교회와 교제 속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증명코자 노력했던 것이다. 로마의 교회만이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지배자이며 그리스도의 사제이다. 따라서 그의 교회의 군주인 로마의 주교에게 복종해야 함을 증명코자 한 것이었다.

반면 개신교는 교회를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독특한 기관으로서, 일반적 혹은 전적으로 결함이 없다고 여겼다. 개신교 역시 교회는 결코 존재함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명백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로마교회가 주장하듯 언제나 가시적이라고 예언하거나 약속하거나 시사한 그 어떤 주장도 성경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주님의 이 교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깨어지거나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으로 조직된 기관이요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의연하게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는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교회가 무오하다는 것을 언급한 어떤 근거도 성경에 없음을 믿는다.

또한 교회는 언제나 무오하게 존재할 것이며 지상에 하나의 단체로서 가시적으로 사람들이 언제든지 쉽게 볼 수 있으며, 어떤 잘못이나 오류가 섞임 없이 항상 하나님의 진리만을 선포하는 교회로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성경적 진술이나 역사적 사실이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이 로마 교회 혹은 교황과 연계된 교회에 적용되는 것이 아님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유형에 대한 질문들은 특성상 거룩한 성경 말씀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올바르게 결정될 수 있음이 명백하다. 개신교나 로마교가 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있는 성경이, 교회에 대해 적절하게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함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혹은 약속하신 교회의 특권들과 권리들과 관련된 것들도, 성경에서 규정한 것을 살펴봄으로서 결정할 수 있다.

실로 이러한 논쟁들은 본질적으로 다음의 질문을 하게 한다. 성경이 근거하는 교회에 대한 정의 혹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설명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적절한 정의 또는 설명을 살펴보는 것은 종교개혁자들과 로마교회 사이에 있는 논쟁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개혁파 교회들의 신앙고백서들은 다 성경적 교리의 중요한 조항으로서 교회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 혹은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

교회에 대한 적합한 정의 혹은 설명이 무엇인지 성경으로부터 찾아 그 중요한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나는 종교개혁자들과 로마교회주의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주도적인 부분이었던 것을 하나 언급하고자 한다.

로마교회주의자들은 다음의 논리를 주로 사용했다. 합법적 사역자가 없는 곳에는 참 교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개신교도들은 합법적 사역자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개혁자들의 답변은 본질적으로 이것이었다. 참 교회가 있는 곳에는 합법적인 사역자가 언제나 있거나 있게 된다. 개신교도들은 참 교회이거나 아니면 교회의 참 지체이다. 그러므로 개신교도들이 적법한 사역을 올바르게 가지고 있거나 가지게 된다는 것은 당연해진다.

따라서 양측의 모든 논쟁은 근본적으로 '참 교회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달려 있다는 것이 명백하졌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교회 참 속성에 대한 성경적 견해, 본질적인 특질들,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한 특징들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달려있는 것이다.

특히 모든 가능한 상황 속에서 적법한 사역을 가지는 것이 본질적인 것인가? 따라서 교황주의자들은 교회의 요소들을 가지고 정의를 내리되, 만일 성경이 허용하고 있거나 증명한다면 그 논쟁을 공식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그들이 선호하는 입장으로 결론을 내리며 종식시킬 수 있도록 시도했다.

교황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교리문답서에 보면, 교회란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동일한 성례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대리인인 가시적 수장의 지도 하에 있는 합법적인 사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모든 신실한 신앙인들의 회중'이다. 교황주의의 위대한 지도자인 Bellarmine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Coetus hominum ejusdem Christianae fidei professione, et eorundum sacramentorum communione colligatus, sub regimine legitimorum pastorum, acpraecipue unius Christi in terris Vicarii Romani Pontificis(동일한 기독교 신앙고백 가운데 동일한 성례들의 교제로 함께 모이고 합법적인 목자들 특히 한 분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 로마 교황의 다스림을 받는 한 공동체)".

그는 여기에 즉시 덧붙이기를 매우 진실로 그리고 매우 단순하게(very truly and very simply)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 qua definione facile colligi potest, qui homines ad Ecclesian pertineant qui vero ad eam non pertinent(이 정의로부터 쉽게 추론할 수 있는 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진정 그것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다면 이 정의는 분명히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결정적으로 해소시킨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신교도들은 늘 그렇듯 그 정의에 들어가 있는 다른 모든 요소들을 위한 성경적 증거들을 요구한다. 그들은 그것들 중 몇몇이 어떤 근거도 제시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관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어떤 개념들이 성경이 인준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의 정의 혹은 설명 속에 무엇을 담아내기를 요구하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말로 번역된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는 때로 회중 혹은 어떤 유형의 회집된 사람들의 모임에 적용되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에베소의 연극장에 모인 격앙된 군중을 묘사하는데 이 단어가 사용됐다. 그러나 이 단어는 더 제한적이거나 특별한 의미로 사용됐다.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사회 혹은 집단을 묘사하는데 쓰인 것이다. 심지어 이런 제한적 의미로 사용됨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 단어가 매우 다른 양상들로 적용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모든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는 말씀, '그는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말씀, '그가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어떤 흠도 허물도 없는 교회로 나타내셨다'는 말씀, '우리가 전체 회집과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교회'라는 말씀을 각각 읽을 때, 우리는 여기 사용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우리 신앙고백서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 서술형으로 쓰였음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즉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앞에 한 가지로 모이게 될 모든 택함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앞에 언급한 본문들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함을 받아 결과적으로 구원함을 받은 자들만 교회 안에 포함되는 자들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택자들의 전체 모임에 구성되는 자들은 믿는 자들과 구원받은 자들이요,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과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때가 되면 그 모임에 가담하는 자들뿐임을 읽게 된다.

더욱이 읽은 본문에서 사용된 그 단어의 참된 의미가 그런 것이라면, 단어의 특성상 그리고 일반적 범위와 대상 차원에서 볼 때 그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다른 의미들이 무엇이든, 실로 그 단어의 한 가지 뜻은 분명 이것이다. 즉 이끌며 안내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남은 시간 동안 좀 더 생각하고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개신교 목사들은 교회를 불가시적인 것으로 늘 말해왔다. 그들이 진정 드러내고자 하는 그 개념은 분명 한 가지이다. 생명에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확실하게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혹은 개별적으로 사람들에 의해 인식될 수 없는 자들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리로 나와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 후에도 그 동료들 혹은 특히 그 모임을 구성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정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가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이 개신교도들로 하여금 불가시적 교회론을 주장하게 된 원인은, 로마교회가 가시성을 견지하고 그것은 외형적 조직을 포함한 것을 교회의 속성에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했고, 이 견해 위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중요한 결말을 도출했기 때문이다.

만일 가시성이 교회 본성에 본질적인 것이라면, 사도 시대 이후부터 공적이고 깨뜨릴 수 없는 계승이 이어지는 집단으로서 지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참 교회로서 추정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위에 로마교회는 항상 로마의 교회의 선언들을 세워나감에 있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성경 안에서 만들어진 정의의 방편에 의해, 개신교도들은 한 몸 혹은 불가시적 교회로써 택자들의 전체 모임에만 적용 가능하다는 불가시적 교회를 주장하게 된다. 이는 교황주의자들이 가시적인 기관으로서 교회의 존엄성과 권위 및 무오성 교리를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개신교도들은 앞에서 언급한 성경 본문들에서 찾아낸 교회라는 단어가 택함을 받아 궁극적으로는 구원받게 된 모든 사람들의 수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중명하면서, 성경만이 우리에게 불가시적 교회를 제시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된 입장에서 가시성을 추론하는 것은 오직 교황주의자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논리에만 해당되며, 적어도 그 주장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교회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주도적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적인 특질은 아니다.

그렇다면 논의의 중요한 주제는 이것이다. 성경은 생명을 얻기로 예정되어 궁극적으로 구원함을 받게 되는 자들로만 구성된 교회, 즉 앞에서 설명된 불가시적인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 개신교도들은 그렇다고 보지만 교황주의자들은 부정한다.

앞에서 인용한 본문들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들을 설명하고자 수고한 벨라마인과 다른 교황주의 저자들의 시도들은 전적으로 실패했다. 이 사람들은 실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는 가시적인 것 또는 사람들의 관찰에 만져질 수 있는 교회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성경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은 가시적 교회뿐 아니라 불가시적인 교회도 제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논쟁거리로 삼지 않았다. 교황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는 것과 달리, 개신교도들은 이 특성들은 두 가지 독특한 혹은 구별되는 주제들이지, 두 가지 다른 유형의 교회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두 가지 다른 양면 혹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요 같은 것이지만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가시적 교회에 대한 성경적 증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보편적 혹은 일반적인 가시적 교회의 존재에 대한 성경적 증거와 그 개념을 이끌어내 발전시킨 방식(the mode)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특정 장소에 위치한 특별한 교회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리고 특별한 지역의 교회들의 이름들을 만난다. 이러한 교회들은 가시적인 집단들임에 틀림없다.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식구들에 의해 구분되는 외적 표시를 지닌 교회들인 것이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는 말씀을 읽을 때, 이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속하게 되는 집단이 이미 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하나님나라 혹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성경에서 종종 교회와 동일시하여 말하고 있다. 인용한 사도행전에 언급하고 있는 경우 주님께서 교회에 더해 주신 자들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그러한 표현이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을 화해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원학적으로나 사실적으로나 에클레시아는 총 회집 혹은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πλητοι) 자들의 회중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세상으로 불러내 그를 믿게 하시고 그의 권위에 복종케 하신다. 그리고 그 자신이 머리이시고 오직 그의 율례에 의하여만 다스림을 받는 조직된 집단의 일원으로 함께 연합시키신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분명한 한 구분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부름 사이 혹은 효과적 부름과 비효과적인 부름 사이의 구분이다. 다른 말로 사실 사도 시대에 이미 발생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한다고 고백하는 자들은 외적으로 플레토이의 집단에 합류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아직 그들이 실제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온전히 영접하지 않았거나 또는 마음으로 그의 권위에 복종하였든 외부적으로는 보이는 교회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았고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자신의 구세주요 주인으로 영접할 수 있게 된 자들은 반드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개인적인 고백과 그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기존 교회에 합류함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들을 함께 감당하며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신 특권들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뜻이요 요구사항이었다. 그러나 어떤 초강력한 수단을 만들어 신실하고 참되게 이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 혹은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고백을 하는 자들 사이를 지구상에서 정밀하게 구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바가 아니다.

따라서 복음 설교를 통해 그리고 사도들의 수고를 통해서, 일반 대중들과 가시적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의 모임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에게 복종한다는 개인적인 고백과 집단적인 고백으로 탄생된 모임이다. 이 모임에 외적으로 가입은 했지만 실제로는 진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었음이 금방 나타난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참된 플레토이에만 적법하고 엄격하게 적용되는 같은 이름들과 표시들을 가지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복음에로의 초청에 순종한다고 고백한 자들의 모임에 가입된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가시적이고 외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관련을 맺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불가시적인 교회와 구별되는 가시적 교회의 실재와 개념이 제기되는 것이다. 가시적 교회는 집단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자들,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외적 표시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구성된 교회이다.

이들은 참되게 그리스도를 따르며 창세 전에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 때가 되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는 자들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자들이다. 불가시적 교회와 구분되는 가시적 교회라는 개념은 비록 그것이 다른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특정 지역이나 도시에 위치한 교회나 교회들을 말할 때 성경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개념이다.

그러나 공교회 개념 혹은 보편적 교회 개념이 가장 명백하게 그리고 가장 적법하게 적용되는 교회는 불가시적 교회 개념이다. 이 불가시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든 시대, 모든 족속, 모든 열방의 사람 개개인들을 포함하는 교회이다.

일반적인 그 개념을 동일하게 가시적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가 아니다. 지금 복음 시대에 있는 교회는 율법 아래에 있었던 전과 같이 한 특정한 나라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교회 혹은 보편적 가시적 교회는 우리의 신앙고백서에 명시된 것처럼 '전 세상을 통해 참 종교를 고백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는 교회를 말한다.

이미 지적했듯 로마교회주의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은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에 대한 개신교도들의 주장이, 성경은 한 교회로의 연합 혹은 하나의 교회를 말하기보다 두 개의 교회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잘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개신교도 하나의 교회를 말한다. 다만 두 가지 다른 측면이 있음을 깊이 생각한 것이다. 즉 내적인 것과 외적 양면성이다. 둘은 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한 영역 안에 있다.

가시적 교회는 불가시적 교회를 포함하거나 구성하고 있다. 비록 그 교회의 나타남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교회는 또한 열등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즉 가라지가 존재하는데 때가 되면 알곡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보편적 교회의 구성원은?

그렇다면 성경이 과연 공교회 혹은 보편적 교회가 영생을 얻기로 작정되어 궁극적으로 구원함을 받게 된 그런 자들로만 구성되는, 그리하여 어떤 측면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불가시적인 특성을 지닌 교회를 말하고 있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증거는 충분하다.

이것은 명백히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원칙적 의미에 부착돼 적용돼 온 주도적 의미로서 필요성에 의해서든 형편에 의해서든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 만일 이것이 즉시 증명된다면 정기적인 외형적 조직을 포함하고 있는 가시성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적 특질로 붙들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의 특권들과 권리들을 가시적 집단 혹은 가시적 집단의 특정한 분량에 굳이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논쟁의 요점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로마교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교회는 결함이 없는 완벽한 교회(indefectible)이며, 또한 결코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을 교회이다. 개신교도들도 이것을 동의한다.

그러므로 벨라마인은 "notandum est multos ex nostris tempus terere, dum probant absolute Ecclesiam non posse deficere: nam Calvinus, et eaeteri haeetici id concedunt: sed dicunt, intelligi debere de Ecclesia invisibili(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교회가 절대적으로 완전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실로 칼빈과 다른 이단들은 이에 주눅이 들어 교회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말했다.

벨라마인이 말한 것과 같이 칼빈과 다른 이단들이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시적 교회에 대한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으로부터 입증될 수 있는 교회의 무결점을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측면은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가셨을 때로부터 항상 그곳에 좌정해 계시다가 다시 오시게 되기까지, 지구상에는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을 받은 혹자들이 항상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구상에 머무는 동안 구원을 준비하는 자들이 항상 있을 것임을 뜻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지구상 모든 시대에 교회가 서 있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을 것이라는 사실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은 이 주제에 관하여 성경의 약속들이나 설명이 내포돼 있음을 입증하는 것 말고는 그 무엇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성경의 모든 진술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예언과 약속들은 성취됐다. 비록 이것을 실감해온 것 그 이상이 아무것도 없어도 말이다.

로마교회주의자들은 이 무결점의 교회가 가시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교회가 존재하는 동안은 반드시 가시성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신교도들은 가시적 교회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택자들로만 혹은 믿는 자들로만 구성된 교회가 아니라고 믿는다. 심지어 '전 세계를 통틀어 참 종교를 고백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만 구성된 보이는 공교회'에 대해 성경은 모든 시대에 계속 존재하거나 어느 특정한 나라에 존속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가시적으로 서 있는 조직된 교회 기관 또는 사람들의 눈에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서 보여지는 교회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성경은 부정하고 있음을 믿는다.

오히려 개신교도들은 성경에는 율법 시대에도 그러했던 것과 같이 바알 신상에게 절하거나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 명의 남은 자들이 있었지만, 선지자 엘리야가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신약 시대에도 어떤 시기 동안 참된 교회가 제대로 갖추어진 보이는 교회의 모습을 가지지 못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씀이다. 그런 사례들은 성경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로마교회주의자들은 더 선언하기를 무흠한 가시적 교회-지금 결점이 없는 교회이며 그들의 입장에서 항상 보이는 교회라고 하는 이 가시적 교회는 늘 존재하고 있고 흠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교회는 언제나 어떤 오류나 뒤섞임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교황주의자들도 이러한 입장을 내세우고자 성경의 진술과 약속들을 찾아 주장하려고 무단히 애를 썼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그 약속들이란 어느 특정한 가시적 교회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가시적인 공교회와 관련이 없고, 그 교회의 어떤 지교회하고도 연관이 없으며, 그 말씀들은 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들이다.

심지어 그들과 연관지어 언급한 그 설명들이나 약속들은 모든 오류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것이 아니며, 신앙의 모든 면에서 그들 사이에 완전한 통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조차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대한 지식에는 어떤 오류가 섞여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을 능히 영생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영적인 설명들을 함께 적용하고 살펴보게 될 때,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들은 오류의 원인이 무엇인지 설명해 준다. 그리고 로마교회가 논의의 일반적 주제로서 이 주제 주변에 얽혀 있는 궤변적 성향이 왜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교회의 무결함, 가시성 및 무오성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가 그들의 일반적 견해에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그 교회의 최고 권위와 무오성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마치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이거나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 교회요 안주인인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 원칙들을 로마교회에 적용하기 전에 먼저 설명되지 않으면 그냥 묵과할 수 없는 간격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찰들은 그 의미와 적용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이 주제에 대해 우리의 신앙고백서가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를 납득하게 도와준다. '이 보편적 교회는 때로는 더 잘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덜 보이기도 한다. 그 보편적 교회에 속한 개 교회들은 복음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수용되는 것에 따라, 그리고 규례들의 집행에 따라 더 순결하기도 하고 덜 순결하기도 하다.

또한 공예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따라 더 순결하기도 하고 덜 순결하기도 한다. 하늘 아래 가장 순결한 교회들도 혼잡과 오류를 범한다. 어떤 교회들은 극도로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회가 된다. 그럼에도  이 지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언제나 존재한다.

회집을 뜻하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기본 어원적 의미로부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즉 그 단어가 참된 신자들 혹은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의 전체 모임을 지칭하는 것으로 우선 적용해도, 이 전체 모임의 한 지점 혹은 지교회에 계속해서 그 개념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례들은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이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라는 말을 읽을 때 그렇다. 성경에는 에클레시아가 하나의 회원을 지칭하는 사례가 전혀 없다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예배를 위해 모이는 한 지교회와 종체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믿는 자들의 전체 모임 사이, 중개자적인 그 어떤 기관을 지칭하는 예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는 독립교회 혹은 회중교회 견해를 지닌 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입장이다. 몇몇 장로회주의자들, 예를 들면 애버딘의 캠벨 박사와 같은 이들도 그 견해를 지지한다. 성경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고 있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양면성을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한 회중에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여러 사례들을 보면 거리상 사방에 흩어진 다른 회중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 역시 그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법이 성경에서 보편적이었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즉 교회에 대한 그 용어가 한 지역 교회에 적용하는 근거 없는 일반적 원리로서 제시하는 타당한 토대를 세우는 보편적인 용법은 아닌 것이다. 또는 각각 지교회의 완전 독립성을 내세우는 근거로 사용하기 좋은 원리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 상황에서 개교회도 하나의 교회로서의 목적을 달성해 가기에 충분하다는 근거로 내세우는 일반적 원리로 사용된 용법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마련한 교회정치 형태에 분명하게 제시돼 있다. '성경은 많은 지교회 회중들은 한 장로회 정치 체제하에 놓여 있는 것임을 붙들고 있다.'

나는 이 제안이 예루살렘과 에베소의 사례들 가운데서 충분히 예증되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 예루살렘의 회심자들의 숫자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들 전체가 공예배를 위해 한 장소에 다 모이기에 익숙해진 자들이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은 구별된 회중들로서 다른 장소들에서 각각 함께 모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몇 가지 측면에서 회중주의자들에게 옹호적인 주장을 한 모세임(Mosheim)은 장로회주의 입장이 아주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실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그 진리를 확실하게 못 박은 유명인사가 됐다.

"Aut nihil ego video, aut certum hoc est, amplissimam illam, quam Apostoli Hierosolymis collegerant, Christianorum multitudinem in plures minores familias divisam fussie, singulisque his familiis suos presbyteros, suos ministros, suos conventuum sacrorum locos fuisse(혹은 나는 보는 것이 전혀 없거나 혹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교훈한 다음 사실이 확실하거나 할 것이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많은 작은 가족들로 분화되었으며 그 각각의 가족들에게는 그들만의 장로들, 그들만의 사역자들, 그들만의 거룩한 처소들이 있었다)".

역사신학 서창원 historical theology
▲윌리엄 커닝햄 박사의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 1960년 판.
그러나 이 개교회 회중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 교회로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다. 여러 회중들로 구성된 이 교회는 사도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한 체제의 감독 하에 놓여 있는 자들로 묘사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한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부터도 그 도성에 여러 회중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시록에 보면 에베소에 있는 그 교회 혹은 에베소 교회(사본에 두 가지 형태로 읽을 수 있는 근거가 있음)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행전 20장에 있는 바울의 고별사에서 사람들의 연합체의 감독 하에 있는 양무리로서 묘사되고 있다. 바울은 그 연합체를 장로들과 감독들로 구성된 모임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 위에 나는 성경에는 단수로 사용된 교회라는 용어가 한편 개 교회와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교회 혹은 공교회 사이에 있는 어떤 중개자에게 적용된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외적 교제와 정치체제 하에 연합된 회중들의 숫자에게 적용되는 단어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회중들의 연합은 합법적이고 타당한 것이다. 어떤 범위로 나아가든 연합 혹은 통합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합법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한 교회의 명칭과 한 교회에 해당되는 모든 일반적인 원리들과 규범들은 통합된 회중에게도 적용이 되는 타당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