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학 1:14)

성령의 책망하심은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하나님의 강력한 개입이다. 그것은 마음의 자세를 교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거대한 전환이다. 그래서 회개는 그 결과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에 대한 구약의 대표적인 예는 성전재건을 주도하였던 학개의 예언활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학개가 예언활동을 시작할 즈음 유다 백성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 당시가 성전건축을 재개할 적합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학개는 유다 백성들의 영적 나태함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우선적 과제는 성전재건임을 역설하였다. 학개의 예언은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영적 타성과 냉담함을 벗어나 성전재건 공사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이었다. 성경에서 '마음'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레브'인데, 여기서는 '영'으로도 번역이 가능한 '루아흐'가 사용되었다.

'레브'의 어원적 의미는 '중심'과 관련이 있다. 곧 '레브'는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위치한 중심으로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인간 삶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레브'는 인간의 겉모습인 '육체'와 대비되기도 하며(시 84:2), 인간의 내면을 이루고 있는 영혼, 이해력, 열정, 의지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시 9:1; 119:2; 잠 3:5; 렘 24:7).

반면에 '루아흐'의 기본적 의미는 '바람'인데, 이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동작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루아흐'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입에서 나오는 '숨'(욥 19:17) 혹은 코와 관련시켜 '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출 15:8; 욥 4:9). '루아흐'는 또한 희노애락과 같은 인간의 기질이나 감정, 혹은 욕망과 같은 의지력 등을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학개는 '레브'가 아닌 '루아흐'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감동이 인간의 역동적 의지력을 자극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감동시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야아르'는 잠이 들거나 조는 사람을 깨운다는 뜻이다. 곧 나태하거나 태만한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이 맡은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재건에 대한 열정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통하여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들의 마음도 감동시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려는 신앙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스 1:1, 5). 그런 열정은 그들이 귀환하자마자 곧바로 성전 주변에 제단을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면서 성전재건을 착수한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외적인 여건의 악화로 성전재건은 중단되었고, 그렇게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전건축에 대한 옛 열정을 새롭게 일깨워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당시 정치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종교지도자인 여호수아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의 마음도 함께 감동시키신 점이다. 고대 사회에서 성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나라를 대표하는 왕이 책임질 문제였다. 솔로몬 성전이 전적으로 왕의 주도로 완공된 것도 그 때문이다. 성전을 건축하는 일뿐만 아니라 성전의 유지와 관리 역시 왕실이 맡은 몫이었다. 반면에 대제사장은 왕의 신하로서 제사와 관련된 업무만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학개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유대는 페르시아 제국에 예속된 조그만 행정 단위의 한 지방이었다. 지방 행정단위로서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인정되었으나, 성전과 같은 큰 건축 사업을 감당할 수 있는 재정능력은 갖추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두 지도자들과 함께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곧 두 번째 지어질 성전은 당시에 정치와 종교를 책임질 두 지도자의 주도 하에 추진되었지만, 재정 부담이나 인력 조달과 같은 실제적 문제는 왕실이 아닌 일반백성의 참여로 해결되었다. 이것이 500여 년간 유지되었던 두 번째 성전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대제사장은 더 이상 왕실에 속한 신하가 아니었다. 그는 성전 관할을 포함하여 종교문제에 관한 한 실제적 책임자였다. 스가랴서 3장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권위 문제가 특별히 거론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마음의 감동을 받은 결과로 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구체적으로 성전재건에 착수하게 되었다. 성경 본문은 성전재건 착수에 관련하여 두 동사로 사용하였다. 곧 '오다'는 의미의 '보'와 '행하다'는 의미의 '아사'가 그것이다. 이 동사는 성전건축이 마침내 재개되었다는 결과를 알려주는 표현이지만, 또한 그 과정이 어떠했는가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들이 왔다'는 것은 본격적인 성전건축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옛 성전 터에 모여서 앞으로 의 일을 상의하며 공사계획을 구상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하나님의 전 공사를 했다'는 것은, 학개가 앞서 지시했던 것처럼, 산에 올라가 나무를 가져오는 일과 같은 구체적이고도 본격적인 성전건축을 재개했음을 보여준다. '공사'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멜라하'인데, 학개 1장 13절에 나오는 '사자'와 '위임'과 같은 어원의 단어이다. 그런 점에서 '공사'는 보냄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사명으로서의 과제임을 암시한다. 곧 일을 해야 할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직접 계획하시고 지시하신 것이기 때문이며,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위하여 부르심과 보냄을 받는 사명자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학개가 예언활동을 시작한 것은 다리오 왕 제 2년 6월 초하루였다(학 1:1).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모든 백성들이 한 마음이 되어 성전건축을 재기한 것은 다리오 왕 제2년 6월 이십사일이었다(학 1:15). 학개가 예언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이십사일 만에 무려 18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왔던 성전건축이 재개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학개의 열정적인 예언활동이 백성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이었다. 성령의 책망하심이 백성들을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였고, 성전재건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일깨워주심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