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니, 죄에 대하여라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요 16:8-11)

보혜사로 오시는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잘못되기 쉬운 취약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들의 회개가 이들 세 영역에 집중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성령의 책망하심은 곧 우리의 회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세 영역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첫째로, '죄'에 대한 책망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곧 죄에 빠지는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롬 14:23)라고 규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히 12:2). 믿음의 경주는 그분을 목표점으로 삼고 달리는 것이다. 그분이 삶의 목표이며 지향점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이다. '죄'로 번역된 헬라어는 '하마르티아'인데, 이에 대한 히브리어 '하타아'는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우선적으로 책망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죄'에 대한 책망은 회개를 통하여 중생에 이르는 결과를 가져온다.

둘째로, '의'에 대한 책망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이다.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떠나가시는 것이 '의'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근심과 걱정에 휩싸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위로하셨다.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보혜사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곧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의로운 길을 걷는 승리의 삶이다.

성령의 '의'에 대한 책망은 당시 예수께서 떠나가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근심과 걱정에 빠진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들은 더 유익한 보혜사 성령의 오심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려는 우리들을 책망하신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요 14:16, 26),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을 알려주신다(요 16:13). 성령께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며(요 15:26),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분이시다(요 16:14~15).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함으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돌보며 지켜주시는 분이시다.

셋째로, '심판'에 대한 책망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이다. 여기에서 '임금'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르콘'은 '권력과 위엄을 갖춘 우두머리 지배자'를 의미한다.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출애굽 때의 바로를 연상시킨다. 자신을 신격화시킨 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바로는 하나님의 열 가지 삼판을 받으면서 초라하고 누추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전락해 갔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430년의 이방 애굽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민족적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심이 입증된 점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의 '심판'에 대한 책망은 세상권력과 자랑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인 것이 그 때문이다(마 6:33).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만 볼 수 있는 '보혜사'는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의 또 다른 표현이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보호하고 지켜주는 대변자, 중재자, 협조자라는 뜻이다. 고대 헬라세계에서 법률상 용어로 사용되었던 이 단어는 변호사보다는 훨씬 더 큰 역할을 하는 일종의 법률고문을 지칭했다. 그러한 보혜사 성령의 중요한 사역 가운데 우선적인 것은 우리를 책망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첫 입문단계이기 때문이다.

보혜사 성령의 책망하심은 '죄'와 '의'와 '심판'이라는 세 영역에 집중된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영역이기도 하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관련이 있고, '의'는 성령의 동행하심과 관련되며, '심판'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준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새 생명의 출발점이다. 그런 우리들은 성령과의 동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길을 걸으며 날마다 새롭게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도 더 중요하게 앞세울 수 없다. 하나님보다 앞서는 것은 아무리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하여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