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희 선교사
▲박옥희 선교사는 “독일에서 기차를 많이 탔는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전도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내가 회고록과도 같은 간증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다.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자도 구원하시고 복음 사역에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도 구원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한인 최초로 독일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44년간 복음을 전파해 온 박옥희 선교사가, 자신의 '썩는 밀알의 삶'을 증언한 책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찾아(꿈과비전)>를 펴냈다.

1939년 신안군 압해도에서 태어난 박 선교사는 1949년 1월 1일 압해중앙성결교회 신년부흥회를 참석하고 회심했으며, 1955년 복음 전파를 위해 살 것을 결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교 졸업 후인 1964년 독일로 떠나, 아그네스 카를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정부에서 독일로 간호사를 처음 파송한 것이 1969년이니, 그 시대에 흔치 않은 유학길이었다. 종교개혁의 본고장 독일의 신학이 우수하리라는 기대감도 컸다.

복음 전파를 위해 간호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은 어린 시절 경험 때문이다. 늑막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당시 부모님조차 포기했었지만, 신앙인인 의사와 간호사들이 '6개월이면 낫는다'며 지극정성으로 돌봐줬다는 것. 원래 목회자가 되어 선교할 생각이었던 그녀는, 그때 '간호사가 되어 사람들의 터지고 상한 곳을 치료해 주면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비전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게 아프리카 슈바이처 박사와 동역하는 간호선교를 꿈꿨다.

부푼 꿈을 안고 힘들게 찾아간 독일이었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부터 생명같이 여기던 '주일성수'를 하려 하자, 간호학교에서는 박 선교사를 '바리새인'처럼 여기고 보내주지 않으려 했다. 병원 옆 채플에 30분만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말도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환자들에게 "30분 뒤 예배드리러 갈 테니 용무가 있으면 지금 말하라"고 선포하고 예배에 참석했다.

온갖 시기 질투와 방해 속에서도 묵묵히 사역을 감당하다 보니, 주위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노인 환자들의 말벗이 되고 시편 23편을 읽거나 기도해 주면서 임종 시까지 곁을 떠나지 않으니, 나중에는 박 선교사가 쉬는 날 환자들이 울 정도였다고 한다.

간호학교를 수료한 후에는 리벤첼(Liebenzeller)선교회 선교신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기숙사비와 일체의 숙식비, 학비를 지급했고, 매달 50마르크의 용돈까지 마련해 주면서 공부에만 전념해 줄 것을 당부했다. 리벤첼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가 창설한 중국내지선교회 독일지부였다.

신학교를 졸업할 때쯤, 박 선교사는 독일에 더 이상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한쪽에는 자유주의자들의 이성적 신앙이, 다른 쪽에는 전통과 격식에 매여 죽은 듯한 신앙이 자리하고 있던 독일의 영적 상황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른 채 신학교 학장은 당시 독일 내 7~8천 명의 한국 간호사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제의했다.

박옥희 선교사
▲박옥희 선교사는 올해 77세이다. ⓒ이대웅 기자
그렇게 7년 반 만인 1971년 요나처럼 사명을 피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매주 편지를 보내며 박 선교사를 끝까지 붙잡았다. 결국 1년 2개월 만에 독일로 돌아갔고, 그 직후인 1972년 11월 졸링엔 루터교회에서 독일복음주의협의회 주관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박옥희 선교사는 졸링엔에 재독한인선교회를 설립하고, '순회선교사'라는 명칭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골로새서 1장 28절 말씀을 기초로 순회사역과 문서선교를 통한 복음전도, 제자훈련과 선교동역자 양성, 성서 연구 등의 목표를 세웠다.

박 선교사는 그곳에서 처음 10년은 독일 전역과 스위스를 걸친 순회전도여행, 그리고 한국 간호사들을 위한 주말 수련회와 성경공부를, 다음 6년은 개척되고 설립된 교회에서의 사역을, 마지막 10년간 한·독 가정을 중심으로 수련회를 통한 선교사역을 2005년까지 진행했다.

29일 만난 박옥희 선교사는 선교사역 중 에피소드에 대해 "굉장히 피곤하고 힘들 때가 있었는데, 코스타 집회에서 한 자매가 만삭으로 새벽기도에 늘 저보다 먼저 나왔던 모습을 기억한다"며 "속으로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인사하면서 '제가 기도하는 사람을 붙여 달라고 기도하고 여기 와서 목사님을 만났다'고 하더라"고 회고했다. 나중에 그 자매는 남편과 함께 성경을 공부했고, 자녀 2명을 낳은 후 중국 선교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박 선교사는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려던 자를 구원하시고 넘치는 은혜의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은 돌이켜 보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며 "허물 많고 시행착오도 있었으며, 상처를 주고받고 자주 절망하고 포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중에 저를 구원의 복음 전파에 사용하셨다"고 고백했다.

이날 동석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장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는 "박 선교사님은 어린 시절 주일성수라는 순수한 신앙을 가졌던 것과 이로 인해 가정에서 고난과 멸시를 받게 된 것이 모두 보배가 됐다"며 "선교에 관심을 갖고 어디든지 찾아갔던 귀한 선교사"라고 평가했다.

김 목사는 추천사에서도 "이 책의 자서전적 간증은 감동적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강권적 섭리의 손길에 붙잡힌 삶이었기 때문"이라며 "많이 수고하셨고, 사랑하고 존경한다. 고맙고 감사하다.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