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서울신대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 제20회 영익기념강좌 및 설립 20주년 감사예배가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30일 오전 부천 서울신대 우석기념관에서 개최됐다.

영익기념강좌는 연구소 설립기금 기증자인 故 김영익 집사(장충단성결교회)를 기념하여 1997년부터 매년 봄 열리는 학술강좌로, 저명 학자들을 초빙해 주로 한국교회 및 복음주의 운동의 최근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뤄 왔다.

이번 강좌에서는 이은선 교수(안양대)가 '3·1운동과 임시정부와의 관계', 박명수 교수가 '1946년 3·1절: 해방 후 첫 번째 역사 전쟁'을 각각 발표했다. 논찬에는 김권정 교수(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이선민 선임기자(조선일보)가 나섰다.

'독립은 하나님의 뜻'... 기독교계, 천도교와 함께 3·1운동

이은선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3·1운동 해석을 둘러싼 사관들 가운데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 운동이 일어난 배경과 함께 전개 과정과 근본 정신,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 미친 영향과 임시정부와의 관련성 등을 살폈다.

이 교수는 "3·1운동은 우리 국민들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시달리고 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美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가 계기가 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에의 열망이 분출돼 일어났다"며 "내부적 원인은 일본의 무단통치와 경제적 수탈에 따른 조선인들의 불만 고조가 핵심으로, 그러한 독립 의지 천명을 외부적 요인(민족자결주의)을 기회로 포착하여 표출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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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그는 "당시 우리 민족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자체가 우리에게 독립의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일본의 통치를 원한다는 일본의 선전이 거짓임을 드러내고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하고자 3·1운동을 계획했다"며 "일부에서 말하듯 러시아의 10월혁명이 3·1운동의 외적 요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오히려 3·1운동의 결과 노동자와 농민들의 의식 각성이 이뤄져 우리나라에 사회주의가 들어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은선 교수는 "국내에서는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고종의 승하, 신한청년당 당원들의 국내 잠입에 의한 독립운동 권고 등이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 준비가 시작됐다"며 "천도교 측과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방 기독교계, 서울 연희전문학교 학생 등이 각자 준비하다, 천도교 측에서 이승훈에게 연합으로 3·1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해 모두 함께하게 됐다"고 전했다.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1919년 1월 말 신한청년당 선우혁이 국내로 잠입해 양전백과 이승훈, 평양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평북·평남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했다"며 "같은 시기 서울에서 YMCA 간사인 박희도, 세브란스병원 직원 이갑성·강기덕 등도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 교수는 "당시 기독교계에서는 '목회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교리가 다른 천도교와 상호 연합하는 것이 가능한가' 두 가지 논의가 발생했다"며 "일부의 반대가 있었지만, 나라의 독립을 구하는 데 상호 종교의 차이가 문제될 것이 없고 '독립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뜻이 모이면서 적극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국내외에 걸쳐 3-5월 석 달간 치열하게 전개됐던 3·1운동의 근본 정신은, 기미독립선언문과 그 전후 발표된 다양한 선언문·포고문들과 격문들에 반영돼 있었다"며 "이를 보면 3·1운동은 민족자존에 근거해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했고, 평화를 바탕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면서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해 독립을 열망하는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반제국주의 성격을 띠며, 한국 사회의 내부적 모순인 봉건제도를 극복해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를 세우는 토대를 놓은 반봉건적 근대 개혁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3·1운동은 민족사적으로 거족적 민족운동이었고, 일제의 우리나라 지배 방식의 변경을 가져왔으며, 전 국민의 동참으로 민족의 독립정신과 역량을 고양해 독립운동을 강화시켰고, 국민들의 의사를 대표한 의결기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이끌었다"며 "우리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그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아, 지구상 유일한 분단 체제와 사회 내부 빈부격차 등 다양한 국가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민주주의와 공공선의 조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해방 후 첫 3·1절 기념행사 당시엔 무슨 일이 있었나

박명수 교수는 3·1운동을 처음으로 기념하게 된 해방 후 1946년 3·1절 기념행사를 통해 당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세력 간의 논쟁과 갈등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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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교수(가운데)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박 교수는 "1946년 첫 번째 맞이한 3·1절은 단지 과거 3·1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새로 세워지는 나라가 어떤 역사적 정통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놓고 양측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 일종의 '역사 전쟁'이었다"며 "지금껏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처음 맞은 3·1절 기념식이 어떻게 진행됐는지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없었고, 당시 좌편향된 언론 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좌익은 일제하 공산주의 혁명에 정통성을 두고 이들이 주체가 돼 인민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데 비해, 우익은 3·1운동과 이를 계승한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두고 민주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3·1운동과 임시정부는 전 국민의 민족운동의 산물이지만, 일제 말 치하 공산혁명은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의 혁명투쟁에 불과해 좌익은 공개적으로 3·1운동을 비난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었다"고 분석했다.

박명수 교수는 "해방 후 3·1절 기념행사를 먼저 제안한 것은 아니러니하게도 조선공산당이었으나 신탁통치를 지지하면서 그 시도가 지속되지 못했고, 민족 진영에서 한민당을 중심으로 각 정당과 청년·부녀단체, 종교단체 대표자들 50여 명이 전국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며 "이 단체들의 명단을 보면 반탁운동의 연장선상이었고, 논의가 발전되면서 이승만·김구 진영도 참여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열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우익을 중심으로 3·1절 기념행사가 준비되는 동안, 좌익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들도 3·1기념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3·1절 기념행사를 준비했다. 만일 우익이 3·1절을 독점할 경우 민족적 정통성에 큰 차질이 예상됐고, 첫 국경일을 우익에게 넘겨 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좌우합작을 제안하고 논의했지만, 이미 우익의 준비가 진행되는 상황이라 통합 노력이 잘 진행되지 않자 결국 남산에서 독자적 기념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박 교수는 "미군정의 보고에 의하면 서울운동장에는 10-20만 인파가 몰렸지만 남산에는 1만 5천여 명이 모이면서 양측 행사는 우익의 승리로 판가름됐는데,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라며 "서울 주요 언론들이 좌익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이미 대중들은 공산주의가 한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좌익은 3·1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봤지만, 우익은 3·1운동의 결과 해방이 왔다고 주장했다"고 이야기했다.

박명수 교수는 "1946년 3·1절을 지나면서 양측은 한국사를 보는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차이는 3·1운동의 진정한 계승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며 "이러한 인식 차이는 결국 해방 후 3·1절을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가의 문제와도 결부됐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은 3·1절 정신에 따라 계급·성별·종교를 떠나 대동단결하여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보는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에 타협한 친일파를 숙청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봤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 안창호는 상해에서 열린 3·1운동 기념식 도중 '과거 1년간 일(日)인은 이 날을 무효화하려 했고, 우리는 이 날을 유효화하기 위해 싸웠다'고 외쳤는데, 약간 무리가 있지만 우리는 이를 해방 후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며 "좌익은 3·1운동을 부정하려 했지만 우익은 계승하려 했고, 이란 대중은 우익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은 3·1정신을 계승하지만,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는 3·1절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고 정리했다.

논찬에서 김권정 교수는 "3·1운동은 단순히 하나의 운동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 '법통'이 대한민국 탄생에 직접적 기초가 된 점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역사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게 일어나는 최근 현실에서, 3·1운동을 통해 그 연원을 살펴본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선민 기자는 "현재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우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이 문제는 좌파와 우파 간에도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며 "1946년 3·1절 기념행사에서 완패한 이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좌파의 모호한 입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좌에 앞서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 20주년 감사예배가 진행되기도 했다. 홍권희 목사(조은교회)의 기도와 이종기 목사(남군산교회)의 '더 열심히 일하는 연구소(창 31:40)' 설교, 박창훈 교수의 '연구소 20년의 발자취' 소개, 유석성 총장의 축사와 민현경 권사(故 김영익 집사 아내)의 유족 인사 등이 진행됐다. 연구소 설립과 유지 등에 기여한 민현경 권사, 이종기 목사, 홍권희 목사와 이성순 장로 등에게는 감사패가 증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