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사가는 윤치호? 안창호?'… 서울신대, 끝장 토론회 개최

이대웅 기자 입력 : 2016.02.17 09:20

작곡가 안익태 선생까지 모두 '기독교인'

애국가 토론회 서울신대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 박사, 이하 서울신대) 주최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가 규명: 안창호인가? 윤치호인가?' 토론회가 16일 오후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진행됐다. 이날 토론회는 200여 명이 몰려 바닥에 앉거나 자리가 모자라 들어가지 못하는 등 대성황을 이뤘다.

이번 토론회는 애국가 작사가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해 온 김연갑 상임이사(한겨레아리랑연합회)와 안용환 초빙교수(서울신대)가 각각 '윤치호 작사설', '안창호 작사설'을 놓고 맞장·끝장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 둘과 작곡가 안익태 선생까지 모두 기독교인이다. 축사는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폐회인사는 이태식 전 주미대사가 각각 맡았다.

개회사에서 유석성 총장은 "대한민국 애국가 작사가는 규명돼야 한다"며 "애국가 가사는 1907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2016년 오늘까지 작사가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1955년 4월 당시 문교부 주관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위) 산하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했으나 작사 미상으로 결론을 내렸다"며 "부디 이번 기회가 우리 역사 미완의 과제인 애국가 작사가를 밝히고 확정하는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1955년 조사에서 윤치호로 확정… 발표만 안 했을 뿐"

애국가 토론회 서울신대
▲좌옹 윤치호 선생.
김연갑 이사는 '애국가, 윤치호가 작사가인 증거 10가지'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애국가 작사가는 매우 진부한 주제로, 맥락에서 벗어난 언설과 사료 왜곡이 횡행하여 오해와 편견이 증폭된 사실에 휩싸이는 것이 곤혹스럽다"며 '윤치호가 작사가인 증거' 10가지를 윤치호의 직접 기록 또는 직계의 기록이라는 '내재적 증거'와 2차 기록물들인 '외재적 증거', 임시정부의 태도와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 등 세 가지로 나눠 정리했다.

김 이사에 따르면 작사가 논쟁은 1955년 4월 2일 美 국무부가 백과사전 수록을 위해 '애국가의 연혁'을 문의한 데서 시작됐다. 문교부는 '작곡가 안익태, 작사가 안창호'로 통보하려 했으나, 여러 신문에서 반론을 제기하자 그해 4월 11일 국편위가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윤치호 국민가' 등의 사료가 발견되면서 작사가가 '윤치호'로 좁혀졌으나, 3차 회의 끝에 '확정을 미루자'는 의견이 나오면서 '윤치호 작사 미확정'으로 남게 됐다. 

그는 "윤치호 외 작사가는 없었고, 당시 회의는 단지 확정 발표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며 "1년 후 국편위가 '윤치호 작사'를 확정해 문교부에 보고하겠다는 기사도 있었지만 후속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이후 60년간 이 상태 그대로"라고 했다. 이것이 첫 번째 증거다.

또 1948년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공보처가 미주에 설치한 홍보전담팀의 책자 <한국 소개(introduction to Korea)>에서 '국가(Korean National Anthem)' 악보에 작사가가 윤치호라고 표기돼 있었던 것이 두 번째 증거다. 1954년 같은 팀이 발간한 악보집 <코리아 랜드 오브 송(Korea Land of Song)>에도 동일했다. 

그는 "이 두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애국가 작사가를 윤치호로 인식하고 대외적으로 명기했으나, 국내에서는 이를 명기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앞서 국편위 조사 결과 '안창호가 아닌 것만은 명백하게 밝혀진 것'과 대비하면 더욱 그렇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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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가 근거로 제시한 미국 LA 1931년 발간 ‘세계명작가곡집’. ‘애국가’에 윤치호 선생 작사가 명시돼 있다.

세 번째 증거는 '임시정부의 태도와 김구의 인식'이다. 당시 국호나 국기는 공포나 규정이 있었던 데 비해 국가는 그렇지 않았으나, 1942년 새 국가를 제정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1945년 2종의 악보가 발간됐으며, 행사마다 개회선언 후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임시정부 애국가 상황에서 확인되는 것은, 만일 안창호가 작사했다면 임시의정원에서 개정 논의를 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김구나 안창호 같은 요인들이 애국가 작사가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이 외에 △안창호의 '소이부답(笑而不答) △'무궁화가' 작사가 '계관시인 윤치호' 확인 △당시 각종 신문·잡지 기록 △일제 감찰기록 △주요한·채필근·윤춘병 등의 증언 △가족들의 확신, 아들과 사위의 기록 △애국가 수록 '찬미가' 존재 △유일한 '자작' 표기 '가사지' 등을 증거로 꼽았다.

그러면서 "정부는 애국가 작사가 규명과 확정을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며 "당시 작사가가 확정되지 못한 것은 친일 문제로 무형의 압력을 받은 것이지만, 윤치호는 현 애국가의 위상에 관여한 바도 없고 우리가 그에게 저작권료를 준 바도 없으므로 순수하게 애국가 자체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논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는 애국가를 국가로 계승한 정통성이 있는 것"이라며 "김구 선생도 '우리가 3·1운동을 무엇으로 했는가.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했는데 그 작사자가 왜 문제인가'라고 일갈하지 않았느냐"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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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부터 ‘윤치호설’ 김연갑 이사, 사회 이길용 교수, ‘안창호설’ 안용환 교수. ⓒ이대웅 기자

"애국가 원조인 '무궁화가'가 안창호 작품으로 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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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
안용환 교수는 '애국가, 안창호 작사의 타당성 16개항'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는 "애국가 작사가를 규명하는 당국자들도 '새로운 안목'을 갖고, 100% 물증에만 연연하지 말고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과 인문과학적 측면에서 시대적 정서에 학문을 결합시켜 1955년 국편위의 재판이 되지 않기를 권면한다"며 "더 이상 작사가 규명의 타이밍을 놓치지 말라. 더 이상 작사가가 '신화와 전설'로 남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안 교수는 "애국가는 '아리랑'이나 '도라지'가 아니다. 인기 있는 대중가요의 가사는 더더욱 아니고, 나라의 얼굴이요 국혼(國魂)"이라며 "따라서 그 작사가는 철저히 검증되고 역사·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 비평 등 두 가지 문학비평을 가감 없이 동시에 받아서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궁화가'는 대한제국 당시인 1897년 전후로 나타난 애국적 가사의 원조 '애국가'로, 작사가는 미상이었다"며 "그런데 제가 '무궁화가 二'를 발견함으로써, 애국창가집의 '무궁화가'를 비롯해 찬미가의 제목 없는 '무궁화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배재학당 등에서 불렀던 '무궁화가'의 작사가가 안창호라는 사실이 탄력을 받았고, 현행 애국가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안용환 교수는 "1995년 3월 안창호의 유가족인 맏딸 안수산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애국창가집'에 수록된 '제14무궁화가'가 안창호 작사로 판명되는 데 결정적 문건이 발견돼, '무궁화가 一', '무궁화가 二' 시리즈가 형성된 셈"이라며 "제목의 연속성과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사 내용은 현행 애국가 가사를 달고 제목을 '제14무궁화가 二'라고 했던 것으로, 애국가의 생명력을 오래 가도록 하기 위한 도산의 깊은 배려"라고 했다.

안 교수는 "여성이 아이를 해산하면 본인만이 그 아이가 누구의 자식(씨)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애국가의 '남편'은 작사가이고 '아내'는 작곡가"라며 "작곡가인 안익태가 누구에게서 가사(씨)를 받았는지가 애국가 작사가를 규명하는 열쇠(key)"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작곡가인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의) 황사선 목사에게서 애국가 가사를 정확하게 받아 적었고,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보우하사>라는 구절을 넣었다고 들었다. 황 목사가 선물로 준 만년필로 애국가를 작곡했다. 안창호 선생이 이 가사를 지을 때, 이틀씩이나 금식기도를 했다'고 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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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교수가 근거로 제시한 안창호 선생의 ‘제14 무궁화가’.

또 안창호 선생의 맏딸인 안수산 씨의 '생애 마지막 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글에는 '애국가를 작사하신 저의 부친 도산에 관한 이야기를...', '저는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한국 국가인 애국가를 도산이 작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제 부친의 이름이 작사가로서 애국가에 표시돼 있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춘원) 이광수의 따님인 이정화와 김여재의 따님인 김 캐시 형자는 그들 부친들이 애국가 작사가가 도산이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등이 나와 있다.

이 외에도 △장리욱·주요한·이명화 등의 증언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 속 증언 △도산 비서실장 구익균의 증언 △도산에 대한 강재환의 단심가 △민족대표 33인인 이명룡 선생의 증언 △방지일 목사의 증언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안용환 교수는 "윤치호 작사설에서 갖는 의혹은, 윤치호 선생이 1883-1943년까지 60여 년 동안 한문과 한글, 영어로 썼던 글인 '윤치호 일기'에 애국가 작사에 대한 내용이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이라며 "그 방대한 일기에 '독서', '휴식', '여느 때와 같이 수업' 등 불필요한 잡서를 쓰면서도 가족을 모아 놓고 말년 인생에 '가사지'를 남길 정도로 집착했는데 애국가에 관한 내용은 한 줄도 없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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