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논쟁 또는 주장을 촉발시킨 저명 종교학자 E. P. 샌더스(Sanders)가 최근 자신의 연구를 집약한 「Paul: The Apostle's Life, Letters, and Thought」를 펴냈습니다. 국내 미출간된 해외 도서 서평을 맡아 주시는 진규선 목사님이 이 책에 대해 세세하게 살펴봐 주셨습니다.- 편집자 주

Paul: The Apostle’s Life, Letters, and Thought


Paul: The Apostle's Life, Letters, and Thought

E. P. Sanders | Fortress Press | 898쪽(paperback) | 39.00달러

서문

E. P. 샌더스는 예수, 바울, 유대교에 관심이 많은 종교학자이다. 그런 그가 바울의 모든 것을 쓰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물을 내어놓았다. 이 책은 바울의 생애와 편지 해석을 중심으로 집필됐고, 바울이라는 인물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원서가 800쪽이 넘어, 서평 분량 조절이 꽤 힘들었다. A4 8장 정도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지면상 책을 따라 서론과 1부와 2부로 나눴다.

서론

우리는 예수를 바울보다 모른다. 예수를 기록한 복음서는 바울의 사후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는 배경 연구가 더 중요하지만, 바울 연구는 거기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 중 심각하게 편집되거나 개정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는 기독교 공동체,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들에 대해 제법 정확한 정보를 준다. 바울 연구의 중요성과 매력은 거기에 있다. 

게다가 27권의 신약 중 13권이 그의 저술이고, 사도행전의 절반도 그에 대한 기록이다. 즉 신약 절반이 바울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물론 바울이 쓰지 않고 바울 노선에 속한 다른 누군가가 쓴 것이라는 논쟁도 있다. 그래서 샌더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일곱 권의 편지, 로마서부터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만 다루고 있다. 

하지만 샌더스가 이 책을 쓴 1차 목적은 학술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그저 독자들로 하여금 바울을 통해 고대 세계를 느끼게 하고, 바울의 편지 내용에 대해 적절히 이해하게 하려고 책을 썼다. 그 목적을 위해 샌더스는 간단하게 바울의 편지 주제와 결론, 논증 방식을 추적하는 세 단계의 순서를 정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 바울을 고대의 유대인으로 봐야지 현대 학자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그럼에도 바울은 당대의 전문가로서 일반인에게 그 편지를 보낸 것이다(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혹은 법률가가 의뢰인에게 전문 지식을 전해 주듯). 그래서 다소 명확한 설명이 필요할 부분들이 있다(예를 들면 바울의 결론은 명확한데 논증 과정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경우,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샌더스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데살로니가전서를 읽고 모든 하위 주제를 찾아서 그것을 자신의 말로 한 문장으로 요약해 오라는 숙제를 몇 년간 냈는데, 딱 한 명만이 제대로 해 왔다고 말한다(대부분 살전 4:13-15을 오해해 16-17절의 주제를 '부활'로 잡는다고 한다. 이 부분이 무엇인지는 책에서 발견하는 즐거움을 가지면 좋겠다). 그래서 샌더스는 바울이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보다 '왜' 그 결론을 내렸는지를 알아야, 바울의 편지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연대기 설정을 해야 한다. 그래야 바울 사상의 '발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바울도 사람이라면 시간에 따라 생각이 바뀔 것이다. 특히 그의 선교 사역이 그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샌더스는 추측한다. 바울 연대기에 관한 샌더스의 추천 서적은 그레고리 타툼(Greogory Tatum)의 「New Chapters in Life of Paul」이다. 샌더스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세세한 부분까지 그레고리 타툼의 연대기를 따른다고 한다. 샌더스는 결론적으로 아래와 같은 순서로 연구를 배열하고 있다.

빌레몬서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10-13장
고린도후서 1-9장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로마서

1부 바울의 생애

샌더스는 바울의 생애를 간략하게 요약한 후, 다시 세부적으로 추적한다. 샌더스는 바울이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났다고 보고, 대략 62/64년 로마 감옥에서(혹은 그 이후 풀려나) 죽었으리라 본다. 샌더스에게 중요한 것은 바울의 소명이다. 샌더스는 바울의 소명을 기준으로 삼아 그의 생애를 기술한다. 

우선 바울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여럿 있는데, 가장 확실한 것은 그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인 '유대인'을 핍박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의 변화는 자서전적 기술(갈라디아서 1장, 빌립보서 3장)에 의하면, 하나의 환상(a vision)에 근거한다. 그는 그 환상을 통해 예수는 부활했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재림할 것이고,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사도가 된 후 바울은 논란에 휩싸이는데, 샌더스가 볼 때 회심 이후 바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논쟁거리는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이 할례를 받고,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해 주는 유대인의 규율을 따라야만 하는가?"였다. 즉 샌더스는 바울의 회심과 이방인의 개종 문제를 그의 삶의 주요 이슈로 보는 것이다.

우선 회심 이전 바울에 대한 유일한 자료는 '사도행전'이다. 심지어 샌더스는 우리가 사도행전 저자에게 큰 빚을 졌다고까지 말한다. 아마 이는 사도행전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그의 높은 평가가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샌더스는 사도행전을 기독교 운동에 대한 변증적 목적을 띤 "뛰어난 헬레니즘 역사 기술 중 하나(a good piece of hellenistic historiography)"로 평가한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이 예수의 무죄성을 논했듯 사도행전은 바울의 무죄성을 논한다. 그리고 누가-행전의 저자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 운동은 불법도 아니고 팍스 로마나에 위험을 가져 오는 것도 아님을 드러낸다(샌더스는 실제로 바울이 겪은 온갖 문제는 유대인으로 인한 것임을 지적한다).

바울의 어린 시절이나 박해자로서의 모습, 그리고 회심 및 그 이후의 전체 사도행전 전개에 있어 그의 생애에 대하여, 샌더스는 기존의 주장과 비교할 때 큰 이견을 내보이진 않는다. 다만 바울의 편지와 사도행전 사이에 몇몇 차이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 중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회심의 문제'가 거론된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혹은 다마스커스)으로 '가는 길'에서 회심을 했는가, 아니면 다메섹에서 회심을 했는가? 다르게 말하자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의 박해자였나, 아니면 기독교인이었나? 이 차이가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 문제는 사도행전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기록됐다는 전제만 받아들인다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샌더스는 암시한다. 

회심 전의 바울

바울은 편지 곳곳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표현을 하는데, 그 중 샌더스는 세 가지 표현을 택한다. 바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그리고 '조상의 전통'이다. 샌더스는 이 세 진술의 구체적인 의미를 찾으려 한다. 

먼저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라는 표현은 배타적인 히브리인이라는 표현은 아니다. 다만 히브리인 전통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며, 과하게 표현하면 오히려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말일 수도 있다. 샌더스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 바울은 헬라어에 능숙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정통 예루살렘에서 학습한 유대인 뿐 아니라 70인경을 통해 학습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도 자부심을 느꼈다. 바울은 아람어와 히브리어도 당연히 잘했겠지만, 예루살렘에서 공부한 유대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샌더스는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습한 것도 의심한다).

'바리새인'에 대해서는 요세푸스와 신약성경, 초기 랍비 문학 등 세 가지 자료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 사해 두루마리(에세네파가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에서도 간접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샌더스는 바리새파에 대한 정치적 역사를 다룬 후 바리새파의 다섯 가지 특성을 말한다(그 다섯 가지 특성 중 하나가, 사두개인이 엄격한 재판관인 반면 그들은 관대한 재판관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울의 '열심'을 설명하는 하나의 열쇠다). 중요한 것은 바울과의 관계성인데, 당대 바리새인이 가르쳤던 십일조와 정결법이 바울에게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고백했을까? 

샌더스는 여기서 소위 ‘새 관점’을 불러일으킨 유대교에 대하여 약술한다. 유대인들은 언약 가운데 태어나며 선택된 백성의 일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혹여라도 그것을 어길 시 범죄에 대한 속죄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다. 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유대교 교리(샌더스에 의하면 유대교에는 교리가 거의 없다)는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실 개신교가 말하는 '행위 구원', '율법주의', '자력 구원' 따위는 유대 문학에서는 발견할 수도 없다. 

바울은 위 두 교리, 하나님의 의(악을 처벌하고 선에 보상하는 것, 로마서 2장 9-10절 참조)와 속죄를 차용하고 있다. 바울과 유대교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유대교는 속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언약 안에 놓여 있기에 아무런 '변화'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바울은 그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고 하는 점이다. 즉 모든 인간은 구원을 보장하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러나 체계는 유대교와 다르지 않다. 

샌더스
▲E. P. 샌더스. ⓒ크리스천투데이 DB

 

새 언약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보상과 처벌 혹은 순종과 회개의 체계 안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주장하는 의미이다. 그 외에도 바리새파의 교리, 내세, 조상의 전통, 자유의지(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섭리와 동시에 인간의 의지를 강조했다) 등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공유한다. 

특히 조상의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즉 바울)의 특징이다. 조상의 전통은 성경을 벗어난 규율들인데, 그것을 중요시했다는 바울의 자기고백은 바리새인으로서 과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다. 그래서 샌더스에 의하면, 바울은 바리새파는 아니지만 바리새파의 많은 것을 공유한 성경 전문가이다. 

게다가 바울의 교육 수준은 이 표현을 이해하는 또 다른 정보가 된다(샌더스는 이 문제에 앞서 기타 소아시아 지역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한 정보를, 바울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적인 것으로서 기본적 수준으로 제공한다). 바울은 헬라어 및 헬라어 구약성경에 능숙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바리새인과는 다른,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특징이다. 그리고 암기와 반복이라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특징도 역시 바울의 70인역 인용에서 드러난다. 

회심 이전 바울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모습은 '기독교 박해자'이다. 우리는 바울이 언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기독교 박해자였는지 모른다. 다만 '왜', '어떻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이 '왜'에 대해서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어떻게'에 대해서는 '고린도 서신'을 고찰함으로써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신약에 나타난 유대교의 기독교 박해에서도 이것과 관련한 아주 정확한(perfectly accurately) 정보를 얻을 수 있다(행 16:19-24을 참조하라). 회심 이전 바울은 아마도 회당들을 돌아다니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고발하며, 배척 내지 태형을 받게 만드는 데 '열심'을 냈을 것이다. 이 열심은 매우 유대인적인 것이지만, 바리새파의 모습은 전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바리새파는 관대한 재판관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 실제 사도행전에 묘사된 가말리엘의 관대한 모습을 생각해 보라. 

회심 후의 바울

회심 후의 바울은 '사도'로 살아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교'라는 관점으로 바울을 보아야 한다. 기독교 운동을 시작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다. 그들이 시작한 운동은 종말론적인 것으로, 예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대를 포함한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주(예수)의 형제 야고보였다. 그의 주도 하에 이 운동이 움직일 때, 바울이 등장하여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하며,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더불어 2세대 기독교 운동 지도자로 부상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바울의 회심이다(바울의 회심과 관련된 지리나 연대기, 특히 아라비아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추정이 많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바울의 회심은 무엇보다 사도행전에 잘 기술되어 있다(행 9장: 3인칭, 22·26장: 1인칭). 몇몇 기술상 차이는 아마도 누가-행전의 저자가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바울 선교의 반대자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용한다는 점과, 누가-행전 저자의 예루살렘 중심적 관점으로 인한 것인 듯하다.

신약 연구에서 논쟁거리는 바울이 회심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도대체 이 회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이다. 회심을 무엇으로부터 돌아선다(turn from)고 정의한다면, 바울은 회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본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심을 무엇을 향하다(turn to)라고 정의한다면, 바울은 회심한 것이 맞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새로운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음부터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을 대상으로도 선교했다(고전 9:20-22). 그런데 왜 그는 갑자기 이방인의 사도를 자처했으며, 자신의 회심에 대해 그렇게 진술하는가? 이 지점에 대해선 사실 확정된 결론이 없다. 다만 샌더스는 세 가지 면에서 바울의 선교 개념을 고려함으로써, 이에 대한 보다 더 개연성 있는 추측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서두에 말했듯 지면상 이 모든 것을 다 실을 수 없다). 

이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여행가'의 삶을 살았다. 당대에는 강도도 많았지만, 육지 여행이든 해양 여행이든 로마 정부의 노력으로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샌더스는 바울의 여행 거리와 날짜까지도 대략적으로 계산하고 있다!). 

바울의 편지는 바울의 삶을 추적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우리는 바울의 인간적 면모를 그의 편지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샌더스는 바울의 따뜻한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울 주위 인물들(디모데, 디도, 실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외 다수)도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뵈뵈 같은 인물은 바울의 여행을 후원한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바울은 하층민도 아니었고, 스스로 일할 수 있는(단순한 노동자 그 이상의) 사람이었다. 그가 선교를 위해 그러한 지위를 포기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샌더스는 이렇게 바울의 삶을 조명하며 1부를 마무리한다. <계속>

도서정보

제목: Paul: The Apostle's Life, Letters, and Thought
저자: E. P. 샌더스(Ed Parish Sanders)는 듀크대 종교학과 명예교수이다. 이전에는 맥마스터대학교,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다. 가장 유명한 책으로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이 있다.
가격: 39.00달러(국내 미번역)ISBN-10: 0800629566ISBN-13: 978-0800629564

/진규선 목사(서평가,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