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영 박사(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대표, 한국목회상담협회 감독).

지독한 여름을 보내고 열병을 앓다 구사일생한 듯한 느낌으로 가을을 맞이한다. 지난 여름에는 수많은 일들이 몰아쳐 너무 고단했었나 보다. 살아남아 새로운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때때로 내가 새로운 고난과 시련을 맞이하면서 슬프고 아픈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또 다른 감사를 하게 된다. 절박한 심정으로 부족한 상담자인 나를 찾아온, 수많은 마음의 통증을 가진 분들을 만나며, 내가 늘 기쁨에 겨워 들뜬 마음으로 지낸다면 지금의 아픈 그분들을 깊이 이해하거나 충분히 공감하지 못할 것 같다는 깨달음이 왔기 때문이다. 

내가 때때로 예기치 못한 시련에 봉착하거나, 슬픔 속으로 가라앉게 되거나, 외로움을 뼛속 깊이 느끼거나 하는 것이, 치유자로서의 내가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고 그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게 하는 자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때때로 내게 쏟아지는 질문들이 있다. “박사님은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없으시지요? 옛날에 이미 치유를 받아서 이젠 항상 행복하시지요?” 그 어이없는 질문에 나는 가만히 웃을 수밖에 없다. 

그분들은, 먼저 치유를 경험했던 내가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왜냐하면 치유 이후에는 고통도 슬픔도 전혀 없는 말끔한 상태가 계속되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치유받은 사람의 표본이 되어버린 내가 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자신들도 치유 이후의 모습이 그럴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들에게 나의 감정을 나누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상황에 맞게 조절하며 치유에 도움이 될 만큼만 연다. 그러다 내가 가끔 슬픔도 느끼고 고통스러운 상황에도 노출되는 것을 알고, 일시적으로 실망감을 나타내는 분들도 있다. “치유 이후에도 또다시 고통이 찾아온다면, 지금 치유받는 의미가 없잖아요”라고 슬프게 말한다. 

또 어떤 분은 내가 현재 너무 행복해서, 자신의 고통과 슬픈 감정들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염려한다. 그러다가 나와 나눈 감정 속에서, 치유를 돕는 나 역시 자신들과 같은 감정에 머물러 있기도 한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다시 긴장감 없는 순수한 치유의 눈물을 흘린다. 

심리치료 혹은 마음의 치료라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 마음속 아픔의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아픔 때문에 돋아난 종기와 종양 덩어리를 찾아서 수술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아플 수밖에 없었던 깊고 깊은 내면의 원인들과 만나며 그 순간의 악 소리 나는 통증을 재경험하기도 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상담자와 내담자의 힘겨운 투쟁이다. 

인생에서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잘 맞는 상담자’를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현재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면, 자신의 상담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표현해 보길 바란다. 그분은 자신의 특별한 시간을 당신과 함께 머물며 치유의 시간을 함께 싸우며 견뎌 주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다. 

물론 심리상담비와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야 하겠지만, 심리상담은 돈을 받고 물건을 주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돈보다 훨씬 큰 무엇인가를 상담자는 주고 있는 것이다. 환자가 큰 수술비를 내고도, 수술을 잘해 준 의사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처럼, 상담자에게도 그렇게 하길 바란다. 상담자들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며, 자신의 생명의 시간을 나누어 주며, 누구보다도 당신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며, 그 아픈 시간 속에 특별한 치유의 시간을 만들어, 함께 머물러 주고 아파해 주는 이들이다.

치료비를 냈는데도 빨리 낫지 않는다고 채근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때때로 상처 준 사람에 대한 분노가 상담자에게 투사되어 분노가 일어나기도 한다. 잠시 동안 그런 감정을 느끼고 치유로 탐색해 보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계속 분노가 일어난다면 치유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잠시 심리상담을 중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렵게 결심하고 찾아간 상담실에서 자신도 실망하게 되고 상담자의 힘을 빼고 슬프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계속된 투사적인 마음이 힘들 경우 상담자를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이다. 마음 치료에는 수많은 기법이 있으며, 한 가지 방법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그만큼 상담자에게도 어렵고 힘든 고뇌의 시간이, 새로운 내담자를 맞이할 때마다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앉아서 들어만 주는 일이 뭐 힘드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약을 주도 것이 아닌데 왜 심리치료비를 내는지에 대해서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미 심리치료가 보편화되어 있는 선진국에서는 의료보험이 적용되고 쉽게 상담실을 갈 수 있는 것에 비해, 아직도 우리나라는 심리상담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이 현실이다. 

심리상담에 대한 무지와 비판의 시각을 접고, 아픈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사람이 당신의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활용하기를 바란다. 아파서 죽고 싶어하는 자신을 방치하지 말기를 바란다. 심리치료를 잘 모른다면 정신과를 찾아가 약을 처방받아 먹기를 바란다. 그런 것이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 

나의 치유를 이루는 과정에 공부와 임상을 하게 되면서, 어느 새 다른 사람의 마음 치유를 돕는 일을 하게 된 나는 문득 생각한다. 이 일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까 하고. 

사람의 모든 행위와 심지어 범죄까지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기도 하고, 독가스가 흘러나와 타인을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살인까지 부르는 마음속의 적나라한 문제들을 다루는 일이 쉽겠는가. 적어도 십 년 이상의 수련과 임상이 필요할 것이고, 끊임없는 자기 분석과 성찰의 시간 속에서 상담자로서의 소양을 닦아야 겨우 조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깊은 치유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흐르는 기적 안에서 함께 피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생명의 일부가 매번 빠져나가는 듯 진이 빠지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단지 내가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가끔 치유의 중반을 넘어가는 나의 내담자들과 삶의 깊은 담론을 나누기도 하고, 조금은 덜 슬퍼진 그분들과 함께 친구처럼 웃기도 한다. 영원의 시간 속에 한 개의 점도 되지 못할 짧은 시간을 함께해 줄 뿐이지만, 이분들과 함께 걷는 상담실 안에서의 ‘특별한 관계’는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분들은 내게 특별하고 또 소중하고 소중한 분들이다. 나의 인생 여정에서 이보다 더 특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혈육을 나눈 내 가족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하고 소중한 관계……. 힘겹고 지칠 때마다 조금씩 살아나 빛나기 시작하는 내담자들의 눈빛을 보며, 나는 특별한 힘을 받는다. 

그들은 나의 도움을 받아 왔고, 내 생명의 시간을 나누는 특별한 시간 속에서 어느 틈에 나의 소중한 친구가 되어 있곤 한다. 그리고 치유를 많이 이룬 후 홀로서기를 한 사람들은 환한 미소로, 또는 깊은 사랑의 허그로 이별을 하게 된다.

‘떠나보냄’이 언제나 쉽지 않은 나에게, 그 이별들은 늘 새롭고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일상에서의 이별에도 익숙하게 되고 슬픔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 우리들은, 치유의 시간을 함께하며 함께 치유되고 함께 성장한다! 치유를 마치고 이별을 고하게 된 분들은 내가 자신 옆에 특별한 관계로 함께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마음을 다해 고마움을 표현한다. 그런 큰 기쁨이 나의 고단함에 대한 보상과 충전이 되는 것이다. 

심리치료 혹은 심리상담이 낯설고 어색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상담자의 소진과 탈진’에 대해 이해해 달라고 하면 시기상조일 것이다. 인생에서 무슨 일이 생기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누구도 나는 그런 곳(심리치료기관이나 정신과병원)을 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치유를 이루고 난 분들의 환한 얼굴과 성숙해진 내면을 보면 나는 늘 감격한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 년간 그 힘겨운 사투를 벌이며, 그분들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 치유의 시간 동안 얼마나 큰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거기에 상담자의 눈물과 기도가 스며 있었는지를 마지막 지점에 와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치료비를 낸다고 해서 그 사랑과 관심이 감소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상담자도 힘겨운 일상 속에서 만난 ‘특별한 치유적 관계’에서, 엄청난 힘을 소진하며 도와 준 것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 상담실에서 상담자와의 특별한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함께 머물러 준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직도 치유가 다 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상처받은 마음에 고여 있는 미움을 치유하고 나면, 고마움의 느낌도 되살아나고 인간의 사랑도 알게 되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분들 덕분에, 나의 일상에 잠입해 들어오는 예기치 못한 시련과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된다. 이 상담자와 내담자는 특별하며, 기적의 시간을 만드는 놀라운 관계다!

성경 이사야서의 영어 버전에 보면 주님을 ‘원더풀 카운슬러’라고 표현한다. 그분과 우리가 놀라운 상담자와 상처에 지친 내담자의 관계인 것이다. 이 땅에 육신을 그대로 입은 예수님이 계시다면, 연약한 인간 상담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사람이 치료와 위로가 된다. 사람에게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면,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곧바로 천국으로 이동하면 되지 않을까. 

여전히 내게는 나를 위로해 주고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나의 위로와 이해와 사랑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     

쉰 해가 지나면서 내 건강은 이 일을 하기엔 너무 지쳐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상담자로서의 내가 꼭 필요하다는 분들을 뿌리칠 수가 없다. 그러면서 또다시 내 발은 저절로 여의도의 작은 상담실로 향하고 있다. 소중한, 무척 소중한 치유의 마음속에서.

그분들의 마음속 깊고 깊은 아픔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무의식의 캄캄하고 절망적인 우물을 함께 들여다 보고 함께 있어 주기 위해서 나는 또다시 길을 나선다. 훈련된 상담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을 느끼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더욱 깊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연약한 한계 속에서도 주님의 깊은 사랑과 능력이 스며들어 나를 북돋아주는 것을 또다시 느끼며, 지금도 슬픔과 아픔이 가득한 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중이다.  

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www.kclat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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