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영 박사(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대표, 한국목회상담협회 감독).

얼마 전, 흑인교회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의 피의자 딜런 루프를 향해, 참혹하게 살해당한 이들의 유가족은 이렇게 용서를 선언했다.

“나는 너를 용서하고, 우리 가족도 너를 용서한다.”
“네가 우리의 용서를 참회의 기회로 삼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내 몸에 있는 살갗 하나하나가 모두 아프고, 나는 예전처럼 살아가지 못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기도하겠다.”

흑인에 대한 혐오주의 때문에 아무 이유 없이 총기를 난사해서 아홉 명의 귀중한 목숨을 앗아 간 살인자를 향한 용서의 선언! 이보다 더 위대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엄마를 잃은 유족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를 다시 안을 수 없고, 엄마와 함께 얘기를 할 수도 없으며, 많은 이들이 너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은 너를 용서하실 것이고 나도 너를 용서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을 벌하거나 꾸짖지 않고 덮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용서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종교에서 그렇게 강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삶의 한 태도로 스며들기가 어려운 개념이 용서다. 

용서는 심지어 내가 용서했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종종 불 같은 분노와 증오심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말로는 다 용서했다고 해 놓고도 문득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며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칠 때, 상처받은 기억 때문에 아파하고 분노할 때, 우리는 용서라는 감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용서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아들 둘을 죽인 범인을 양자로 삼아 진심으로 사랑한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은 이 세상의 사람 같지 않다. 

나와 친밀한 어떤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용서를 선포한 이후에도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 놓기도 했다. 교인들에게는 용서하라고 해 놓고 정작 본인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으니 위선자 같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타인이 나에게 한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약간의 잘못은 쉽게 용서가 된다. 그러나 내 자식을 죽였거나 유괴한 범인을 용서하기가 쉬운가. 그렇게 용서가 어렵기 때문에 그만큼 숭고한 일이기도 하다.   

용서는 잘못을 한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삶의 관문이다. 그러나 서둘러 용서하라고 강요하지는 말아야 한다. 더구나 아무런 참회도 하지 않는 범죄자가 빈정거리듯이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넌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용서할 줄은 모르니? 넌 나를 용서해야만 해.”

영화 밀양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유괴한 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간 여주인공에게, 범인이 이런 뉘앙스로 말한다. “저는 하나님께 제 잘못을 참회하고 용서를 받았어요. 당신도 저를 용서해야 해요.”

죽을 만큼 힘든 결심을 하고 찾아갔던, 죽은 아들의 엄마는 그 순간, 용서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더욱 처참한 감정 상태가 된다. 그렇게 쉽게 범인을 용서했다는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게 되고,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린다. 그런 후 반기독교적인 복수를 시작한다. 자식을 잃은 엄마의 심정이 되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런데 미국 흑인교회의 유족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 용서를 선언할 수 있었을까. 그들 중 일부가 기독교인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약간의 위선이 포함되어 있었을지라도, 그들의 선언은 위대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빨리, 내 자식을 죽인 자에게 “용서한다. 널 위해 기도할게.”라는 말을 한단 말인가.  

심리학 박사 프레드 러스킨은 “용서란 평온한 감정이며, 그런 감정은 자신의 상처를 덜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지고 그 사건에서 피해자가 아닌 승리자가 되었을 때 생겨난다”고 말했다.  

상대방을 향한 미움에서 풀려날 때 비로소 자신도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말하듯이, 용서는 프로세스다. 용서는 치유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된다. 너무 서둘러 용서하라고 채근하면, 상처가 더해지고 분노의 감정이 커져서 용서를 가로막게 된다. 

내게 극심한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한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한, 그 용서는 철저하게 위선일 뿐이다. 지금 당장 깨닫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용서되지 않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치유되어야 용서가 된다. 그래서 용서부터 하라고 하면 안 된다. 치유가 되는 동안 어느 새 용서는 기적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잊어버리는 것’과 ‘용서’는 다른 개념이다! 잊어버리면 용서가 된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망각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무의식으로 상처를 밀어 넣고 눌러 놓는 것이다. 내면에 남아 있는 증오와 원망의 마음이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다.  

망각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상처받은 감정을 묻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망각을 택하지 말고, 기억해 내고, 파헤치고, 치유받고, 그리고 용서로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내담자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이 제게 극심한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용서하신다면 저는 더 상처받을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제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요. 그가 구원받는다는 걸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그러면 하나님도 미워하게 될 거예요!” 

최근에 사악한 사기범죄에 희생된 충격과 상처를 지닌 사람이 있다. 참으로 신뢰하고 좋아했던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너무 커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되었다. 날카로운 칼로 베인 듯한 상처에서는 쉴 새 없이 검붉은 피가 솟구친다고 했다. 

마음을 다쳐 혈액이 소멸되도록 깊이 아픈 동안에 서서히 말라서 죽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사악한 사기범은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에게 마음과 신뢰를 주었던 시간들이 모여 더 깊은 상처의 골짜기를 만든다. 그리고 자괴감과 수치심에 몸서리를 친다. 

마음과 신뢰를 얻은 후에는 반드시 돈을 갈취하는 것이 사기범들의 수법이다. 돈만 잃어버리는 것보다, 사람에게 주었던 마음과 신뢰의 시간들은 그 무엇으로도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사기범을 잡아 검찰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보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 범죄자의 행위 때문에 참담한 고통과 배신감에 크나큰 상처를 받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 절망과 비참한 심정은 설명할 길 없는 고통을 동반하고, 수 개월의 불면과 사람에 대한 공포감으로 이어졌다.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던, 애정과 신뢰의 대상이었던 그 범죄자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그녀 자신도 죽이고 있었다.  

“나는 그 사기범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몇 년간 나는 철저하게 속았고, 내 모든 걸 잃었어요. 우리 가족들도 상처받았고,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었어요. 내 인생은 망가졌어요!”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그 처절한 고통을 보았기 때문에 용서하라는 말도 할 수 없다. 더 충분히 미워하고 더 충분히 분노하도록 기다려 줄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악한 사기범죄가 사람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끔찍한 행동이다. 살인을 한 죄보다 가볍다고 할 수 없다. 믿었던 사람에게 철저하게 속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당하면 안 되는, 너무 깊은 상처와 고통이다. 치유가 되기 위한 시간은 멀고도 험난할 것이다.   

그 범죄자는 현재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조금의 참회도 없다고 했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부인하며, 속아서 충격 속에 있는 사람들을 모욕하며 비웃고 있다고 했다. 그 범죄자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잠깐 동안 법의 형벌의 받고 감옥에서 풀려나면, 또다시 똑같은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 그런 사악한 자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용서는 어떤 사람에게 해야 할까? 이것은 크리스천의 근원적 질문이다. 성경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십자가에 못을 박았던 로마 군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십자가 위에서 피투성이가 된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는 살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상처받고 자괴감에 빠진다.  

어느 날 종교 불안이 극심한 한 내담자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열왕기하에 보니까 엘리사가 자신을 대머리라고 놀렸던 아이들 수십 명에게 저주를 하자, 수풀에서 곰이 나와서 그들을 찢어 죽였다는 구절이 있어요. 하나님의 선지자가 저주를 하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죽였나요? 하나님이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너무 무서워요.”

나도 정확하게 그 구절을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 치유 전문가인 내 입장에서 보면, 엘리사도 일반적이고 많은 상처를 받아온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단순히 대머리라고 놀린 일만 가지고 엘리사가 그토록 화를 내면서 저주를 퍼부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청소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구약에서 선지자에게 부어졌던 하나님의 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만인제사장 시대인 오늘날엔 적용되지 않는다. 구약성경 곳곳에서는 그들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그 누구라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시지만,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보복하시고 죄악에 단호하고 무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엘리사가 자신을 대머리라고 놀리던 아이들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웃으면서 지나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엘리사가 어릴 때부터 무수히 들었던 놀림에 대한 상처가 치유되어, 자존감 높고 인격이 더욱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오래 전부터의 상처가, 이제 엘리야의 능력을 막 물려받은 뛰어난 선지자인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쌓여왔던 분노의 감정으로 폭발되어 나온 것은 아닐까. 성경에는 모든 정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저주가 임해서 곰에게 찢겨 죽은 이야기만 읽으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상처받고 불안한 인간은 사랑보다는 공포에 더욱 빠르게 반응한다. 사랑은 못 느껴도 공포는 쉽게 느낀다. 십자가의 사랑은 십자가의 공포로 재해석되어,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말의 힘은 이런 것이다. 엘리사의 저주가 그 자리에서 당장 나타났던 것처럼, 내가 지독한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 한 나의 저주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에게 적용되지 않을까. 이것은 무서운 진실이다.

“네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다. 당신은 땅 위에서 무엇을 묶었는가? 

“네가 말한 대로 내가 이룬다!”고 성경에 나타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 저주의 말 대신에 용서와 평화의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내 자식을 죽이거나 마음을 갈갈이 찢어 놓은 사악한 범죄자에게 “하나님, 너무 가슴이 아파요. 대신 복수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못하겠는가. 

치유가 일어나고 용서를 선언할 수 있을 때까지 ‘대신 복수해 주시는 하나님’께 부탁해도 된다. 이사야서에 보면,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는 구절이 있다. 신원의 날이란 보복의 날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 대신 모든 원수들에게 복수해 주셔서,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주시고 나의 슬픔을 위로하신다는 뜻이다. 그렇게 기도해도 된다고 하신 하나님이 무척 고맙고 감사하다. 나 같이 연약한 인간에게 “내가 대신 보복해 주마!”라고 말해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사랑의 능력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치유는 더욱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복수를 직접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다. 이것 역시 너무나 연약한 우리를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크나큰 섭리이다. 성경에는 복수도 용서도 있다. 복수의 마음은 치유되는 동안에 저절로 사라지고 용서만 남게 된다!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은 범죄에 희생되어 상처받은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친히 복수해 주신다. 그리고 범죄자가 진정으로 참회하지 않고 사악한 범죄를 계속해서 짓는다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 

지금 당장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아무리 용서하는 척 위선을 떨어도, 마음속 깊은 곳의 증오와 분노의 응어리를 잠재울 수는 없다. 나는 위선을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외친다. 

“하나님, 우리에게 죄를 범한 사악한 범죄자들에게 복수해 주세요. 내가 겪은 고통을 갚아 주세요!”라고.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내가, 혹은 당신이 한 말에는 크나큰 위력이 있다. 가끔씩은 엘리사처럼, 즉시 나타나는 능력이 내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상처받은 나, 그리고 짐승보다 못한 사악한 범죄자들에게 상처 입은, 나의 내담자들을 위해서. 말한 즉시 곧바로 저주가 임하는 능력이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의로운 분노가 들끓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연약한 시간이 흐른 후에는, 궁극적인 용서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언젠가는 위대한 사람들처럼 용서의 능력도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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