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감신대 대학원 로비에서 3·1운동 민족대표 7인의 부조 제막식이 열렸다. ⓒ고준호 기자

감리교신학대학교(김외식 총장)가 개교 120주년을 맞아 감신 출신 3·1운동 민족대표 7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부조를 제막했다.


특히 친일행적으로 문제가 됐던 정춘수 목사가 민족대표 7인에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미화된 역사가 아닌, 진실을 말함으로써 후배들이 잘된 것은 본받고, 잘못된 것은 반성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3시 감신대대학원에서 ‘역사의 반성과 미래의 조망’이라는 취지 하에 열린 부조 제막식에는 민족대표 33인 유족회 회장 이현기 선생 등 내외빈 2백여 명이 참석했다. 부조 제막식 후 감신대 출신 동문 및 재학생 2백여 명은 민족대표 7인의 사진을 들고 서울 냉천동에 위치한 감신대에서 독립공원까지 행진했다.

이필주, 신흥식, 최성모, 정춘수, 신석구, 오화영, 김창준이 감신 출신 민족대표 7인이다. 이외에도 감신대는 의병장 출신 최초 순국 목회자 구연영 전도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선 전덕기 목사,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임시정부 수립에 힘쓴 현순 목사,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 등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

▲왼쪽 상단부터 김창준, 신석구, 신홍식, 오화영, 이필주, 정춘수, 최성모


감신 출신 민족대표 7인의 약력
<정리=이덕주 교수>

이필주(李弼柱, 1869-1942)
서울 출생. 어려서 한학 수학. 구한국부대 장교로 있다가 1902년 부하 20명을 인솔하고 상동교회에 출석. 상동교회 부속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 체육교사 역임. 1907년 청파동교회 개척 및 왕십리교회 전도사 역임. 감리교 협성성경학원 2년 과정 수료. 1915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 1919년 서울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던 중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2년 6개월 옥고. 출옥 후 서울 미아리와 용두동, 경기도 남양에서 목회. 1934년 정년 은퇴 후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꿋꿋한 신앙생활로 본을 보이다가 남양에서 별세.

신홍식(申洪植, 1872-1939)
충북 청원 출생. 어려서 한문 수학. 1901년 구국일념으로 기독교 개종. 1909년 미감리회 전도사로 직산에서 목회 시작. 1913년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2회). 1913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 1919년 평양 남산현교회를 담임하던 중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2년 6개월 옥고. 출옥 후 인천 내리교회를 거쳐 강릉지방과 원주지방 감리사 역임. 복음 전도와 민족계몽운동 교재 《장수옹》(長壽翁) 간행. 1935년 은퇴 후에도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본의 종교정책을 비판하는 강연을 한 혐의로 수차례 투옥. 노환으로 청주에서 별세.

최성모(崔聖模, 1874-1937)
서울 출생. 어려서 한학 수학. 1888년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진사가 됨. 1905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개종. 전덕기 목사와 함께 신민회원과 황성기독교청년회원으로 활약. 1912년부터 서울 서강교회 전도사로 목회 시작. 1914년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2회). 1916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 1919년 해주 남본정교회를 담임하던 중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2년 6개월 옥고. 출옥 후 상동교회와 서강교회, 만주 목단강교회와 대련교회, 천안교회와 예산교회 담임. 1933년 은퇴 후 수원에서 노환으로 별세.

정춘수(鄭春洙, 1874-1951)
충북 청주 출생. 어려서 한문 수학. 191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1회). 1911년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 1919년 원산 상리교회를 담임하던 중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1년 6개월 투옥. 춘천지방 감리사, 신간회 간사 역임.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1939년 감리교 3대 감독이 되면서 ‘혁신교단’으로 체제를 개편, 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여 신사참배를 비롯한 황민화정책을 적극 추진. 해방 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검찰부에 체포되어 조사받고 나온 후 천주교 개종을 발표. 피난 중 청주에서 별세.

신석구(申錫九, 1875-1950)
충북 청주 출생. 어려서 한학 수학. 서당 훈장을 하다가 1908년 고랑포에서 기독교로 개종. 개성에서 목회 시작. 1917년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 1919년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던 중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2년 6개월 옥고. 1922년 감리교협성신학교 졸업(8회). 이후 원산, 고성, 춘천, 가평, 서울, 철원에서 목회하였고 이안지방과 천안지방 감리사 역임. 일제말기 천안과 진남포에서 신사참배를 반대, 투옥되었고 해방 후 반공비밀결사 조직 혐의로 인민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 중 전쟁 발발직후 순교.

오화영(吳華英, 1879-1960)
일명 오하영(吳夏英). 황해도 평산 출생. 어려서 한학 수학. 1909년 개성에서 전도사로 목회 시작. 1914년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 1918년 감리교협성신학교 졸업(6회). 1919년 서울 종교교회를 담임하던 중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2년 6개월 옥고. 1927년 신간회 조직에 참여. 1929년 광주학생사건, 1939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투옥. 해방 후 정치계에 투신하여 조선민족당 당수,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 조선정치대학 학장, 2대 국회의원 역임. 1950년 전쟁 중 납북된 후 평양에서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최고위원 역임.

김창준(金昌俊, 1890-1959)
평남 강서 출생. 1914년 평양 숭실대학을 거쳐 1917년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5회). 1919년 서울 중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2년 9개월 투옥. 1922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목사 안수. 1926년 미국 게렛신학교 및 노스웨스턴대학 졸업. 1933년 감리교신학교 실천신학 교수. 1941년 신학교 폐교 이후 은둔생활을 하다 해방 후 1947년 기독교민주동맹 창당. 1948년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참석차 방북했다가 평양에 남아 공산주의 정권수립에 참여, 북조선 최고인민위원회 부의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