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는 지난 3월 2일 '봉경 이원영 목사와 신사참배'라는 주제로 201회 학회 모임을 가졌다.

봉경(鳳卿) 이원영 목사(李源永, 1886-1958)는 1886년 7월 3일에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에서 태어났으며, 퇴계 이황 선생의 14세 손으로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 등에 반대하며 순수 신앙을 지킨 신앙인이었다.


이날 임희국 교수(장신대 교수, 교회사 및 역사신학)는 학회 모임을 통해 이원영 목사의 생애와 신앙을 일제 시대의 신사참배 문제와 창씨 개명 등의 연장선상에서 조망했다.

1.이원영 목사와 신사참배

이원영은 일제의 황민화정책(조선교육령개정·신사참배강요·창씨개명)을 모두 거부했다.

장로교회의 총회가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직면해 있던 때 이원영은 1937년 5월에 열린 제31회 경안노회 정기노회에서 총대들에게 우려가 섞인 권면을 했다. 5월 28일 오전 경건회 시간에 그는 구약성경 요나서 1장 1-5절까지 봉독하고 "요나의 좌경"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튿날 오후 2시에 모인 속회에서 그는 요나서 2장 전체를 봉독하고 "요나의 일(一)선생맥"이란 제목으로 설교했고, 그 다음날(30일) 오후 2시에 모인 속회에서 그는 역시 요나서 4장 전체를 봉독하고 "하나님의 견책"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지금의 경안노회와 장로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불순종한" 요나,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다시스로 도망친 요나,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배가 풍랑에 휩싸여 부서지기 직전인데도 배 밑바닥에 누워 "달게 잠을 자는" 요나처럼 될 것을 우려하며 말씀을 선포했다. 이는 결코 신사참배강요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같은 해 6월 초순에 이원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안기교회의 목회를 그만 두어야만 했고, 6월 8일의 수요일 저녁기도회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했다. 강단에 올라선 그는 신약성경 히브리서 4장 14-16절을 본문으로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교인들에게 떠난다는 인사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한 채 그는 안기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2.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결의
1938년 2월에 장로교회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그해 9월에 열린 총회까지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또한 그해 제27회 장로교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경안노회는 이러한 대세에 따르며 노회의 이름을 조선예수교 장노회에서 '기독교 조선장노회'로 바꾸기로 결의했다.

1939년의 장로교회 제 28회 총회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총회는 각 노회별로 지부연맹을 만들어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도록 했다. 총회의 결의에 따라, 안동의 경안노회도 1939년 12월에 열린 제34회 정기노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 장로회 경안노회 연맹'을 결성했다.

경안노회 제36회 정기노회(1941. 6)는 신사참배로 개회했다. 노회는 소위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는데 발을 맞춰 갔다. 경안노회는 또한 전쟁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각 교회들을 통해 유기(놋그릇)헌납, 애국기헌납을 했고, 또한 전승기도회, 징병제실시 축하회를 가졌다.

경안노회가 이렇게 일제에 온갖 협력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제38회 정기노회(1942. 12. 15-18)를 마지막으로 노회를 폐지시켜서 '경북 교구단'에 소속시켰다. 경안노회는 이름마저 사라져 버린 채, 향후 3년 동안(8·15광복까지) 어떠한 모임도 가질 수 없었다.

3.황민화정책을 거부한 신학적 근거
일반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회지도자들의 신학적인 근거가 종말사상에 있고 더욱이 전천년 종말론(前千年終末論)에 근거해 있는데, 이원영의 종말론도 거의 다르지 않았다. 이원영은 안기교회 목회시절에 사용했던《관주 신약전서(1930년 간행)》의 뒤쪽 여백에 천년왕국 곧 세상 마지막에 그리스도가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땅을 다스리게 될 왕국에 관해서 설명한 '종말론 도표'를 가지고 있었다.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하며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굳게 붙잡은 교회지도자들은 임박한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고,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면서 신사참배처럼 허망된 것 앞에 머리를 숙임으로써 계명을 어기지 말고 오히려 계명을 끝까지 지켜서 예수의 재림을 맞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대주의적 종말사상은 구약 다니엘서를 기반으로 우상숭배거부와 함께 묶여져 있다. 즉, 다니엘서에 기초한 종말론적 역사의식 속에서 신사참배거부와 우상숭배거부를 동일시했던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들 가운데(채정민, 김경희 등)는 지금 이 시대야말로 구약의 바벨론시대와 동일한 양상을 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본은 바벨론에 해당되고 조선은 유대에 해당된다'고 보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조선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는 일은 마치 '바벨론의 우상숭배를 거부한 유대인들을 풀무불에 던져 넣은 것'과 같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이 아니라 십계명 가운데서 제1계명에 위배되는 명백한 우상숭배로 판단했다.

4.광복과 교회의 재건
8·15광복을 경산경찰서 유치장에서 맞이한 이원영은 출옥 후 교회의 재건에 앞장섰다. 그는 일제의 탄압으로 없어져 버린 경안노회를 다시 복구하고, 안기교회를 서부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복구했다.

8·15광복이후의 장로교회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지나온 과거를 청산해야 했다. 특히, 일제의 힘에 굴복해서 가결된 신사참배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해결방법을 위한 논의가 논쟁과 분규로 발전되고, 게다가 교단이 신학논쟁에 휩싸여서 이것이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이원영은 1945년 9월 3일부터 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돌면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가는 곳마다 교인들은 그를 '산 순교자'로 존경하면서 환영했다.

그의 로마서 강해는 특별히 '죄에 대한 뉘우침과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면서 진행되었다. 말씀 선포를 통해서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신사참배강요에 굴복, 신사우상 설치, 그리고 교회 강제통합 등) 돌이켜 보면서 깊이 뉘우치며 회개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20일에 안동교회에서 '경안노회 제39회 복구회'가 모였다. 이번 노회에서 이원영은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경안노회는 일제시대 말기에 그를 목사직에서 면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에 지난 일을 되씹으며 자신을 면직시킨 노회에 대해서 분노를 발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져 내린 노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앞장을 섰기에 그를 노회장으로 선정하는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이원영의 자세와 달리, 다른 '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얼룩진 교회를 말끔히 청소하는 것을 제일 우선적인 과제로 잡았다. 이를 위해서 부산에서 '경남재건노회'(1945. 9. 18)가 모였다. 여기에 참석한 자들은 신사참배 죄에 물들지 아니한 깨끗한 신앙인들만의 모임을 추구했다.

이원영은 이에 대해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당한 목사·장로·집사·교우들이 마음에도 없는 절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큰 괴로움 속에 있었고, 또 신앙의 지조를 유린당하면서도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가? 여기에 비하면 감옥에 갇힌 성도들은 오히려 신앙양심을 지킬 수 있었고, 감옥생활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피난처가 된 셈이었다. 따라서 출옥성도는 자만하고 남을 정죄할 것이 아니며 오히려 수난당한 교회와 성도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말하며, 출옥성도는 '유대교적 율법주의'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과 태도는 안동 지역의 교회를 불협화음 없이 다시 일어서게 했고, 또한 경안노회가 평안한 가운데서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불과 약 10년 동안에 장로교회는 두 차례나 분열되었다: 고신측-장신측, 장신측-조신측 등. 교회복구의 기쁨은 잠시뿐이었고 교단분쟁과 교회분열로 말미암은 고통이 오랫동안 지루하게 지속되었다.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혹시 또다시 분열이 일어날까봐 조바심하면서 '교회의 단결과 평화'를 이끌어 줄 지도자를 갈망하였다.

이 상황에서 이원영은 제 39회 장로교회총회(1954)의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총회장으로서 그는 과거 신사참배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신앙양심을 바로 세우며 교단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신사참배취소성명]을 발표하는데 주관했다.

총회회기의 마지막 날인 제5일째에 회장 이원영은 사가랴 8장 18-19절을 봉독하고 "금식일이 변하여 기쁘고 즐겁고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그러므로 진실과 평화를 좋아하라"는 본문의 뜻을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화해를 선포했다.

임희국 교수는 "이원영은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했을 뿐만이 아니라 황민화정책(조선교육령개정, 신사참배, 창씨개명) 전부를 거부하였으며, 이원영 연구를 통해서 신사참배연구의 범주가 일제의 황민화정책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한 이원영의 저항은 8·15 광복직후에 그가 보여준 겸손한 신앙자세를 통해 빛이 나기 시작했다"며 "이러한 이원영의 신앙자세는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들의 연합과 일치운동(에큐메니칼운동)을 위하여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고 강조했다.